▲ 박제훈 객원논설위원/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유럽을 흔들고 있다.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정부 지출을 확대하면서 늘어난 재정적자가 유럽 각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그리스, 스페인 등 그간 재정구조가 취약한 경제에서 국가 부도의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유럽연합의 미래가 불투명해 지고 있다. 적자 규모의 축소를 위한 정부지출 삭감계획이 나오면서 그리스에서 시작된 노조의 파업이 전 유럽에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마침 나는 오랫동안 별러 왔던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탐방을 위해 2월 하순부터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유럽의 격변을 현장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해 바로 마주치는 것이 그리스 알파벳이다. 학교에서 수학 공식에만 사용되는 알파, 오메가로 적힌 간판이나 표지판을 해독하기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주요 거리에는 영어와 같이 표기되어 있어 서로 대조하며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스가 유럽 문명에 기여한 바가 무엇일까? 우선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비롯한 민주주의 제도를 들 수 있다. 초기에 귀족 집단에 의해 독점된 정치권력이 솔론의 개혁에 의해 각 부족과 지역, 부에 따라 분권화되고 제도화됐다.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가 왜 하필 그리스에서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이 탐구해 온 과제였다. 집단보다는 개인이 우선시되는 것은 산과 바다가 같이 있는 자연환경이 한 요인일 수 있다. 그리스의 경우 가는 곳마다 산이 많았다. 전 국토의 70%가 산이고 그것도 바위산이다. 농사짓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다. 자연히 지중해 특히 에게해와 수많은 도서들로 구성된 동지중해를 배경으로 배를 타고 장사를 하는 것이 생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는 것은 큰 하천을 배경으로 넓은 평야에서 농사를 짓는 것에 비교해 집단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노력과 판단이 주요하다. 이러한 자연환경과 조건이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개인의 자유와 참정권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한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스 하면 신화의 나라이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서양 철학의 발상자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가 보면 그리스가 그리스 정교의 본산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가는 곳마다 성당이 있고 유적지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것보다 훨씬 많다. 이러한 문화적 측면 외에 보다 피부로 와 닿는 것이 그리스 경제의 침체다. 가는 곳마다 70에서 80% 세일하는 가게가 눈에 띄지만 손님은 별로 없었고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았다. 더욱이 파업의 여파로 박물관도 문을 닫고 아테네 중심에서는 근래에는 보기 드물게 최루탄이 터졌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경제가 안 좋은데도 일주일에 3일은 오후 3시까지밖에 가게가 문을 안 여는 것이었다. 오래된 관습이자 제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적당히 일하고도 경제가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되어 보인다. 비단 그리스만이 아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등 이번에 국가 부도 위기의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 적당히 하고 강성 노조의 철밥통을 자랑하는 국가들이다.
유럽은 현대 글로벌 스탠다드로 거론되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의 지배 등을 제도화한 문명이다. 더욱이 20세기 들어와 유럽연합을 통해 유럽에서 전쟁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종식시킨 문명이기도 하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은 문명이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주변국에 대한 관심이 적고 너무 내부 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과거 문명의 전성기를 함께 구가했던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럽이 그간 유럽연합의 외연적 확장에 에너지를 소모한 탓이기도 할 수 있다. 또한 지난 연말 출범한 정치연합이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서 본 오늘날의 유럽은 너무 늙어 보인다. 세상에 영원한 번영은 없다. 오늘날의 유럽의 문제가 경제정책이나 대외정책의 실패 때문이라면 유럽은 얼마 안 있어 다시 정상화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활력과 자생력을 복원하는 힘을 상실한 것 때문이라면 유럽은 문명 쇠퇴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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