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에서 장르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영화는 기껏해야 일 년에 5편 내외로 만들어졌으니 굳이 장르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장르라는 단어가 성립하려면 비슷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고,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해야 하며, 비슷한 아이콘이 나와야 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장르가 성립할 수 없었다. 쉽게 생각해 보아도 한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 이를 본딴 비슷한 영화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하나의 컨벤션을 이뤄 장르가 된다.

   
 

가령 서부극의 경우 멋진 건맨이 악의 세력과 싸워 결국 이긴 뒤 유유히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건맨이라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날렵하면서도 맵시 있는 모자, 세련된 조끼, 다리를 돋보이게 하는 날씬한 바지 등이 쉽게 떠오른다. 말을 타고 다니며 총을 귀신처럼 잘 사용한다. 이렇게 장르는 곧 캐릭터이며 이야기다.

장르가 성립하려면 기본적으로 영화가 산업이 돼야 한다. 산업이 돼야 발 빠르게 다른 영화를 본따 비슷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데, 한국영화사에서 그 시기가 바로 1950년대 후반이다.

1955년 엄청난 흥행을 한 ‘춘향전’(감독 이규환)과 1956년 거대한 흥행을 한 ‘자유부인’(한형모)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충무로 시대’가 열렸다. 명동보다 저렴한 충무로의 골목골목에 다방과 밥집과 영화사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영화시대가 형성된 것이다.

영화가 돈이 되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자본은 충무로로 몰려들었고, 유능한 인재들은 배우와 감독으로 영화를 지망하게 되면서, 1955년 15편이던 제작 편수가 1959년이 되면 무려 111편으로 늘어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 즉 장르가 형성되면서 사극, 멜로드라마, 코미디, 전쟁 영화, 스릴러액션 영화 등이 등장한 것이다.

1960년대가 되면 장르는 더욱 세분화된다. 가령 영화사가 고(故) 이영일 선생은 스릴러액션 영화를 분류하면서 범죄스릴러 영화, 전쟁 소재의 액션 영화, 구형 활극, 스파이활극 영화 등으로 나눴다.

 이영일 선생의 분류가 맞는지 아닌지 평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1960년대가 되면 서브 장르가 형성될 정도로 장르는 이미 한국영화계에도 일반화됐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이미 특정 형태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층이 두텁게 형성됐다는 말이다.

항구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 영화가 등장한 것도 1960년대 중·후반이다. 범죄스릴러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고 이영일 선생은 범죄스릴러 영화를 구분하면서 마도로스 영화의 경향으로 분류했는데, 단지 마도로스가 주인공인 영화만이 아니라 항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범죄를 그린 모든 영화를 ‘항구 누아르’라고 칭할 수 있다.

‘제삼부두 영번지’(김시현, 1966), ‘비정의 항구’(강민호, 1968), ‘항구 8번가’(임원식, 1969), ‘돌아온 선창’(전조명, 1969), ‘항구 무정’(정진우, 1970), ‘항구의 왼손잽이’(강범구, 1971), ‘돌아온 항구의 사나이’(전우열, 1970), ‘비나리는 선창가’(임권택, 1970), ‘홍콩의 단장잡이’(최영철, 1970), ‘홍콩의 마도로스’(최영철, 1970), ‘공포의 황금부두’(이혁수, 1971), ‘황혼의 제3부두’(전우열, 1971), ‘제3부두 고슴도치’(이혁수, 1977), ‘무정의 제3부두’(이혁수, 1993)….

   
 
제목만 들어도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를 위해 정진우 감독의 ‘항구 무정’만 살펴보자. 오랜 항해에서 한 사나이(박노식 분)가 부산으로 입항한다. 그에게는 사연이 있다. 하역장의 이권을 장악한 조직의 넘버2였던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성(남정임)이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이권을 가로채려는 다른 조직의 보스(황해)가 함정을 파서 그를 절벽에서 떨어지게 한다. 이후 그는 항구를 떠났던 것이다. 돌아온 항구는 변해 있었다. 사랑하는 아우(트위스트 김)가 자신을 배반해 다른 조직에 들어가 있었고, 사랑하는 여인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즐겨 찾던 바에서 다른 여성(김지미)을 만난다. 그리고 사건이 전개되면서 다른 조직의 보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되고, 자신의 사랑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보스를 죽인 다른 조직의 보스에게 복수하고 사랑도 되찾는다.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다른 영화도 비슷하다. 항구의 이권이나 밀수를 둘러싼 범죄조직이 등장하고, 그 조직과 연계된 주먹 쓰는 사나이가 주인공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성이 있는데 조직 내 배신이나 다른 조직의 공격 때문에 피신했다가 돌아와 복수를 하고 연인을 찾는 내용이다.

사연을 가진 남성의 아우라를 강하게 보여 주기 위해 마도로스나 선원의 낭만적 이미지로 포장했고, 남녀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기 위해 바다를 배경으로 했으며, 남성들의 격한 싸움을 강조하기 위해 부두의 하역장이나 폐선 근처로 장소를 설정했다. 돈과 사랑과 의리와 복수가 있는 액션 영화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배우들은 당대 최고의 배우가 등장했다. 대부분의 영화에는 당대 최고의 액션 스타인 박노식이 출연했고, 한창 뜨고 있던 신세대 액션 스타 김희라가 얼굴을 자주 보여 줬다.

장동휘와 황해, 허장강도 단골 손님이었음은 물론이다. 여성 배우로는 당시 트로이카였던 남정임이나 윤정희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고, 김지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 액션 배우들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단골로 출연하는 조연배우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울 수도 있다.

항구 누아르라고 칭한 영화들은 가끔 홍콩과 일본과 연결해서 반공 영화 또는 반공첩보 영화로 바뀌기도 했다. 가령 신경균 감독의 ‘마도로스 박’(1964) 같은 영화는 밀수혐의로 체포된 마도로스 박이 압송 도중 탈출하다가 그를 노리고 있던 조총련계 간첩들에게 총격을 당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는 10여 년 후 귀국해 국내에서 암약하는 간첩 일당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홍콩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총련계를 밀수와 첩보로 연결시켜 박진감을 노리는 동시에 시국에도 기여하려는 의도의 발로였다.

항구 누아르가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항구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적인 영화가 등장한 지 오래됐던 때였다. 장 가뱅의 연기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안개 낀 부두(Port Of Shadows)’(마르셀 까르네, 1938)나 말론 브란도가 최고 연기를 보여 준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엘리아 카잔, 1954) 등이 이런 계열의 명작들이다. 한국에서도 범죄 영화가 장르로 확립되면서 자연스럽게 항구의 이권과 밀수를 둘러싼 사랑과 액션의 판타지를 스크린에 재현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영화들의 영화적 배경은 대부분 부산이지만 실제 촬영은 많은 부분 인천에서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 속 주인공은 부산항에 도착해 남포동의 건달조직과 갈등을 벌인다. 홍콩이나 일본으로 출항하거나 입항하는 것도 부산이다.

당시 풍속이 그러했으니 인천보다 부산에서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실제 촬영하기 위해서 부산에 가기보다는 인천에서 촬영하는 것이 거리상 쉽다. 그래서 해운대나 오륙도 같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부산 명소에서 몇 장면을 촬영하고 나머지 장면은 세트나 항구도시 인천에서 촬영했다.

그래서 ‘돌아온 항구의 사나이’ 같은 영화는 부산이 배경이지만 인천의 자유공원과 홍예문이 능청스럽게 영화 배경으로 그대로 등장하고, ‘황혼의 제3부두’에서도 부산이 배경이지만 인천의 배에서 촬영했다는 것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더욱 이상한 것은 부산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영화 속 인물 가운데 아무도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들 표준어를 정확히 구사한다. 그래서 부산이지만 부산이 아니고, 인천이지만 인천도 아닌 제3의 공간이 돼 버린다.

자연스럽게 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단지 항구라는 조건만 갖추면 되는 공간이 돼 버린다. 그래서일까? 부경대 김남석 교수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당시 영화를 두고 “항구도시라는 특성에 기인할 뿐, 항구가 담고 있어야 할 문화적·지역적·정서적 디테일에서는 성취를 거두지 못했다”(김남석, 「한국영화에 나타난 부산·경남과 그 문화적 양상」, 《동남어문논집》 20호, 69쪽)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항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담지 못하고 항구를 배경으로 한 의리와 복수, 사랑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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