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제 인천구월서초등학교장

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그 중에서도 10월을 가장 아름다운 달로 꼽는다.

물론 대자연의 섭리를 헤아린다면 4계절 모두가 아름답고 경이로움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희망과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한 봄 또한 진정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래도 가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은, 녹색 일변도로 단장하는 봄의 얼굴보다 천자만홍 가을의 화려함이 더 눈길을 끌기 때문일 것이다.

봄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녀 같은 모습이라면, 가을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외출하는 매혹적인 여인의 자태이리라.

가을을 표현하는 말 또한 다양하다. 결실의 계절, 독서의 계절, 사색의 계절, 최근에는 캠핑의 계절이라 표현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데, 모두 나름 의미있고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은 여전히 天高馬肥(천고마비) 아닐까?

천고마비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살기 좋은 기후와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성하고 넉넉한 계절 가을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러나 漢書(한서) 匈奴傳(흉노전)에 기록된 천고마비의 본래 의미는 우리의 인식과는 크게 다르다.

고대 중국 殷(은)나라 때부터 북방에 출몰하기 시작한 흉노족은 周(주), 秦(진), 漢(한)을 거쳐 거의 2천 년 동안 왕조와 백성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유목생활을 하는 흉노족은 말 타는 기술과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늘 중국 북방 변경의 농지를 약탈했다.

그래서 중국 군왕들의 큰 과제 중 하나가 흉노족을 막는 것이었다. 燕(연), 秦(진), 趙(조)나라는 각각 북쪽 변경에 성을 쌓았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시황(始皇)은 그 장성들을 연결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길이가 너무 길어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흉노족은 추운 겨울철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위가 오기 전, 곡식이 가장 많은 가을에 변방에서 노략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애써 농사를 지은 곡식을 약탈해 가는 흉노족이 악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당나라 초기 시성으로 일컬어지는 두보의 할아버지 두심언에게는 글도 잘 짓고 무예도 훌륭한, 문무를 겸비한 소미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흉노족 침략을 막기 위해 변방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두심언은 흉노족 토벌을 위해 변방에 나가 있는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며 시를 지어 보냈다.

‘雲淨妖星落(운정요성락):구름 고요한데 불길하게 별이 떨어지고/ 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가을 하늘 높아지며 변방의 말은 살찐다./ 馬鞍雄劍動(마안웅검동):말에 올라 탄 장수는 칼을 휘두르고/ 搖筆羽書飛(요필우서비):붓을 움직여 곳곳에 격문을 띄운다.’

이 시의 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라는 구절이 천고마비로 바뀌어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라는 말로 변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니 오곡백과가 풍성한데, 이때가 되면 흉노족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두렵다’는 것이 중국 변방에 있는 사람들의 푸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래된 천고마비는 흉노족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의미였던 것이다. 이런 유래와 달리 국어사전은 천고마비를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하늘이 맑고 모든 것이 풍성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천고마비 계절 가을은 그야말로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더구나 단군왕검에 의해 우리 민족의 하늘이 처음 열리고, 건국이념이며 교육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이 초현된 계절인 것이다.

우리가 근대 들어 외세의 침략과 민주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고, 산업화 추진 과정에서 물질문화로 사회가 이동되면서 반만년 면면히 이어온 민족정신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인간 육성이라는 교육이념 또한 약해지고 있다.

어쩌면 홍익인간의 이념도 천고마비 속에 자리한 옛 사람들의 푸념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구호로 침잠돼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끊임없이 발생하는 갖가지 교육 문제도, 교육이념의 이해와 구현 의지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교육이 개인의 경쟁력이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임을 되새겨보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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