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추수의 계절이면서 국군의날, 개천절, 한글날 등 국가경축일과 기념일이 많은 달이다. 동시에 농경문화의 원류를 되새겨보는 달이기도 하다.

10월 속을 들여다보면 경축일이라는 의미 외에 민족의 전통명절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사실 민족의 전통적 명절을 기리는 행사는 고대부터 제천행사를 통해 거행돼 왔다.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계절제 등은 모두 추수감사를 즐기는 행사였다.

모든 제천의식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하늘에 감사하는 국가적인 하늘제사로써 백성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낸 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며칠간 계속했다.

특히 10월을 상달이라 불러,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먼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농경신화를 창조한 주인공들이었다는 데 있다.

 즉, 우리 민족이 과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이 아니라 한곳에 정착해 사는 농경민족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군조선 시절 기본법인 팔조금법에는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변상한다고 돼 있다. 만일 우리 조상들이 유목민족이었다면 곡식이 아닌 사냥한 짐승으로 변상한다고 했을 것이다.

 부여나 고구려의 경우 반농반목적(半農半牧的)인 경제생활도 일부 엿보이지만 대부분 농사가 본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촉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주거를 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게 짓기를 좋아한다”고 돼 있다.

이런 제천행사는 대부분 10월에 거행됐다. 다만 삼한에서는 5월 파종 때와 10월 수확 시기에 두 차례 축제를 열었다. 이는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기 때문에 농사와 관련돼 축제 시기가 정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농경지 근처에 정착해 살았다.

또 밭이나 논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어야 해 그들은 촌락을 이뤄 살게 됐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야만 계절의 변화에 따라 씨를 뿌리고, 김매고 수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절의 변화에 맞춰 관습적으로 되풀이되던 때가 명절이 됐으며, 각 명절에 행해지던 여러 가지 행사와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전승돼 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농경문화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을까.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된 작물은 벼·보리·조·피 등이었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60만~7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북방학자들은 벼농사가 북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하고, 혹자는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환태평양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저절로 자생하게 됐다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나라에 아열대 식물인 벼가 재배되기 시작했을 무렵, 북중국은 추운 기후적 조건으로 인해 벼라는 식물이 살 수가 없었다. “농업인의 수고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쌀 한 톨도 남기지 말라”던 부모의 잔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쌀 한 톨이 나오려면 88번의 손길이 필요하고, 최소한 55가지의 수고가 들어가는 복잡한 재배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씨앗만 전해졌을 리도 없다.

따라서 신석기 말 볍씨를 가져와 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 조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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