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조선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 점차 심화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우리의 땅에서 벌어진 전투였던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느덧 120년이 지나고 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반도를 두고 벌였던 청일전쟁은 역사로 남았지만 그 흔적은 당시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지만 현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기에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집자 주>

# 청일전쟁과 인천

▲ 수송단대를 태운 운송선 9척이 요시노 이하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에 도착하는 모습.

개화정책 추진에 반발해 일어난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개화정책이 위축됐다. 이후 급진 개화파가 위기를 맞고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그 결과 1885년 청과 일본은 조선 내 세력 균형을 위해 조선의 의사와 상관없이 향후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대국에 이를 통지한다는 톈진조약을 맺는다.

1894년 5월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이 확산되면서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는 청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고 며칠 뒤 인천에 일본군까지 상륙하게 된다. 청일 양국의 출병으로 양국 관계가 험악해지고 각국 군함들도 정황을 살피기 위해 인천에 빈번히 내항했다.

7월 25일 오전, 청군 군함 제원호·광을호가 청나라 군대를 아산에 상륙시키는 임무를 마치고 중국 여순으로 회항하던 중이었다. 이때 미리 풍도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순양함 요시노호·아키츠시마호·나니와호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풍도해전(豊島海戰)이 시작됐다. 청군 제원호는 백기를 달아 일본에 항복했고, 광을호는 도망쳤다.

일본 군함이 제원호를 추적하던 중 또 다른 배가 눈앞에 나타났다. 중국에서 출발해 아산만으로 향하던 청군 함대인 정찰함 조강호, 상선 고승호였다. 아키츠시마호는 조강호를 추격해 나포했고, 조강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나니와호는 고승호를 향해 닻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니와호를 따라올 것을 요구했다. 고승호의 영국인 선장은 전함에 맞서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군함 명령에 따르겠다고 했으나, 청군 지휘관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명령에 불응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30분 만에 고승호는 침몰하고 말았다. 1천여 명의 청군이 바다에 빠졌지만 배에 타고 있던 영국인 선장과 독일인 장교 등 몇 명의 유럽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대부분 구조가 됐다.

풍도해전 이후 일본은 청 군함이 일본 군함에 대해 포격을 했다는 구실로 청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본격적인 청일전쟁이 시작됐다. 성환전투, 평양전투 등에서 청나라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이듬해 2월 청나라의 항복으로 청일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은 청과 일본이 벌였으나 그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 인천 앞바다에 침몰한 고승호
청군 상선인 고승호는 당연히 청나라 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인도차이나 기선항해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가 소유한 영국 국적의 증기선이다. 76.2m 2천134t급의 규모로, 1883년 여객과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세계 최대 해상보험 인수 단체인 영국 로이드(LLOYD) 보험회사에 보험이 가입돼 있었고 청군을 운송하는 용선계약을 맺었다.

   
 

고승호는 당시 아산에 있던 청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중국 다구(大沽, 톈진의 외항)에서 출발했으며, 1천200여 명의 병사가 승선해 있었고 12문의 대포와 탄약, 군자금이 있었다고 전한다.

# 수차례 시도된 고승호의 수중 발굴
고승호는 인천 덕적면 울도 서남방 약 2㎞, 해저 20m 지점(위도 N37°00′, 경도 E126°59′)에 침몰돼 있다. 서해는 갯벌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배가 깊숙이 침몰하게 되면 그 상태가 잘 보존되는 편이지만 조류가 센 바다에서 인양 작업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부터 고승호는 배에 실려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300만 점의 금은보화와 보물에 대한 추측 때문에 보물선이라고 불렸다. 당시 풍도해전의 해상전투 기록과 청나라의 사료에서 군자금으로 쓰일 은 937.5㎏이

   
 
고승호에 실려 있던 것으로 기록돼 고승호를 인양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왔다.

일제강점기부터 수차례 발굴을 시도했으나 깊은 수심과 조류, 기술 부족으로 매번 실패하다가 2000년대 한 민간기업에서 발굴을 시도하게 된다. 여러 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다양한 유물들이 인양돼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고승호 출토 유물
고승호에서는 동전, 무기, 도자기, 유리, 선박 자재 등이 인양됐다. 청일전쟁을 전후해 청나라의 군용자금으로 많은 마제은이 유입됐는데, 소문처럼 많은 양의 금은보화는 없었지만 마제은으로 추정되는 37.5g짜리 은괴가 발견됐다.

그 외 당시 국제화폐 역할을 하던 멕시코 은화, 러시아 적동화와 건륭통보, 광서통보, 가경통보, 관영통보 등 여러 종류의 청·일본 주화도 발굴됐다. 특히 멕시코 은화는 19세기 중국과 무역할 때 대금 결제에 많이 쓰였는데 중량이 일정해 신용도가 높았으며,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 은화에 자리를 내줬다.

이 밖에 소총, 실탄, 탄피, 칼 등 무기 수백 점과 치약용기, 은잔, 술병, 수저, 아편파이프 등 영국 제품의 생활용품, 여러 문양이 그려진 다양한 도자기 편도 발견됐다.

▲ 이현진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원

이렇게 다양한 유물이 인양됐음에도 불구하고 침몰 장소 하나만으로 침몰한 배가 정말 ‘고승호’라고 단정짓기엔 그 증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굴된 유물들 중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증거가 눈에 띈다.

바로 은제 숟가락과 도자기 파편 일부다. 이 유물들에서 고승호 제작회사인 ‘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회사명과 회사를 상징하는 깃발이 확인돼 침몰한 배가 고승호라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됐다.
<글=이현진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원>


일청전투화보(日淸戰鬪畵報)

   
 

메이지 27년(1894년) 10월 18일 인쇄되고, 21일에 발행된 일청전투화보이다. 풍도해전에서 청국 함대를 격침하는 장면이 삽화로 실려 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는데, “7월 25일 7시 풍도 근처에서 청나라 병사를 태운 운송선과 군함을 막고 발포하였다.

광을호를 소실시키고 조강호를 포획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실제로 일본의 입장과 청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 달라 광을호가 소실됐는지 도망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삽화에서 고승호에 청나라 국기가 걸려 있는데, 로이드북(고승호 보험회사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고승호는 영국 국기도 장착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삽화에서는 고승호의 영문(Kou Shin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려움)과 한자명(高升)이 배에 크게 적혀 있다. 현재 ‘고승’의 영문 표기는 ‘Kow-shing’이며, 한자는 ‘高升’과 ‘高陞’을 혼용하고 있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은 이 같은 사진과 화보, 판화, 석판화, 유리건판, 채색 접시, 일청전쟁실기, 고승호 출토 유물 등 다양한 청일전쟁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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