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지에 실린 강화지도.(돈대와 외성이 보인다)
“섬을 둘러 모두 바다다. 서쪽과 남쪽은 넓고 물가가 없으며 오직 동쪽과 북쪽의 두 나루 사이가 그다지 넓지 않지만 물살이 세고 암초가 있기 때문에 조수를 살피고 건너야 한다. 그러므로 오랑캐를 방어하기에 적합하다.”

인천 소암마을 출신으로 조선시대 문신인 이형상이 지은 「강도지」의 서문(序文) 가운데 강화도의 입지를 묘사한 내용이다. 강도지는 강화도 국방의 필요성을 숙종에게 올리기 위해 찬술한 책이다. 그만큼 강화도가 당시 조선의 관방에서 갖는 의미는 남달랐다.

강도지의 글귀처럼 강화도는 한강하구에 자리잡은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하늘이 내린 요새로 불릴 만큼 독특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탓에 조선시대 이전부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비하는 데 중요성이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 배를 댈 곳이 없었던 섬
강화도는 오늘날 하나의 섬이 됐지만 본래 마니산 일대는 고가도(古家島)라 불리는 별개의 섬이었고,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도 거의 섬의 형태에 가까워 크게 2~3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었다. 불뚝 솟은 산지 사이로 바닷물이 깊숙하게 들어왔고 해안선의 굴곡은 심했다. 섬 주변으로는 지금보다 더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 간척으로 형성된 강화도의 농경지.
강화의 갯벌은 썰물 때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밀물 때는 바다에서 조류를 따라 퇴적물이 섬 주변에 쌓이면서 이뤄진 것이다. 여기에 빠른 물살과 7~8m가 넘는 큰 조수간만 차, 겨울철에는 강에서 떠내려오는 얼음덩어리들이 더해지면서 눈앞에 빤히 바라다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음에도 육지에서 강화로 들고 나는 것은 수월치 않았다.

조선의 대표적 지리지인 「택리지」의 “강화부의 북쪽으로는 승천포, 동쪽은 갑곶에만 배로 건널 수 있고 그 외는 모두 수렁이다”라는 기록처럼 강화는 질퍽한 갯벌과 급한 조류와 암초, 겨울철 유빙으로 승천포와 갑곶 등 일부 제한된 지점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천혜의 요새였다.

# 하늘이 내린 요새, 고려의 도읍이 되다
13세기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곳을 강도(江都)로 불렀다. 개경을 떠난 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접어두고 강화도가 천도지로 결정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이 자연 방어선으로 둘러싸여 방비에 유리하다는 점이었다. 육지는 몽골군에 의해 여러 차례 유린됐지만 고려는 강화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천도 이후 강화에는 개경에서 옮겨온 왕실과 관리, 군인 등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됐다. 사람이 많아진 만큼 식량이 필요하게 되면서 토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해 농경지를 만들었다. 당시의 모습은 1256년(고종 43) 제포(梯浦)와 와포(瓦浦) 등을 간척해 둔전으로 삼았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전한다.

▲ 계룡돈대.

개경으로 다시 돌아간 이후에도 크고 작은 규모의 간척이 조금씩 이뤄지면서 강화도의 지형은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화해 갔다. 지속적인 간척은 강화도의 해안지형을 점차 단순화시키면서 예전에는 갯벌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했던 지역이 점차 줄어들었고, 조선전기에는 승천포와 갑곶 이외에도 인화, 정포, 광성 등에도 배를 댈 수 있게 됐다.

#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로 만든 연못이 무너지다
개경으로 돌아간 이후 천험(天險)의 금성탕지(金城湯池)인 강화도의 중요성은 큰 전란이 없었던 탓에 왕조가 바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잊혀졌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사시 왕실과 조정이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의 필요성이 대두됐는데, 그 과정에서 강화도의 가치가 다시금 부각됐다. 특히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3개월간 피난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을 계기로 강화도는 남한산성과 함께 왕실의 보장처로 설정됐다.

▲ 포대에서 바라본 염하수로.
하지만 병자호란 때 강화도는 인조가 들어오지 못한 채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들어와 항전했지만 청군이 갑곶나루에 도강을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돼 강화부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군비의 열세와 청군의 치밀한 전략과 전술 탓도 있었지만 지형조건에 대한 맹신과 나태함이 불러온 아픔이기도 했다.

# 보장처의 방비를 새롭게 하다
조선정부는 강화도가 쉽게 함락된 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효종은 병자호란 당시 대군의 신분으로 강화가 함락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병자호란 당시 적병의 상륙을 막지 못한 것을 교훈 삼아 먼저 효종~숙종 연간에 단계적으로 12개 진·보를 인천과 교동, 안산 등 다른 지방으로부터 옮기거나 새롭게 설치하면서 강화도 연안을 둘러싸게 됐다.

한편, 이와 더불어 군사를 운영할 수 있는 식량의 확보를 위한 농경지를 마련하기 위해 간척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간척사업은 효종~현종대에 주로 진행됐는데 강화도 북쪽과 동쪽 해안을 시작으로 18세기 초 선두포언의 축조로 마니산 일대가 본섬과 이어지면서 사업의 대강이 마무리됐다.

당시 간척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뤄졌지만, 간척을 위해 쌓은 해안제방은 복잡한 강화도의 해안선을 손쉽게 통행할 수 있는 교통로의 역할도 수행했다.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하려는 노력은 숙종 연간에 결실을 보게 된다. 1679년(숙종 5) 해안 간척으로 새롭게 형성된 해안선의 요충지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돈대는 외적의 침입과 움직임을 탐지하고 상륙을 저지할 목적으로 쌓은 군사시설로 이후 작

▲ 강화산성.
성, 초루 등 5개를 추가로 쌓아 모두 53개의 돈대가 강화도 해안 4면의 요충지에 배치됐다.

또 1691년(숙종 17)에는 염하를 따라 외성을 축조했다. 이미 해안가 요충지에 돈대를 쌓았지만 돈대의 간격이 넓어 적군의 상륙을 보다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그 사이를 성으로 연결했다.

외성은 처음에 북쪽의 휴암돈에서 남쪽의 초지까지 토성으로 쌓았지만 이후 붕괴된 일부 구간에 벽돌을 이용해 개축하거나 석축으로 다시 고쳐 쌓았다.

예전에는 갯벌과 바다 자체가 방어선이 됏지만 간척으로 인한 지형 변화로 이전보다 육지에서 강화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가 증가했고, 더욱이 한 번 함락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돈대와 외성과 같은 방어시설의 설치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외성을 쌓은 지 3년 뒤인 1694년(숙종 20)에는 갑곶 건너편에 있는 문수산에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을 쌓았다. 1711년(숙종 37)에는 강화부성을 오늘날의 모습처럼 남산과 견자산까지 포함하는 규모로 확대하면서 문수산성, 외성과 돈대, 강화부성으로 이어지는 강화도 방어체계의 골격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교동의 통어영(統禦營)을 중심으로 한 수군이 강화의 외곽을 방어하면서 보장처 강화의 방어체계가 완성된다.

이후 강화도의 전략적 의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보장처의 개념에서 개경·수원·광주와 함께 도성 수비의 4개 거점 가운데 하나로 변화됐지만 조선의 관방에서 강화가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차이가 없었다.

# 준비되지 않은 이방인과의 만남
18세기 이후 강화도의 방비체계는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과 동아시아를 둘러싼 세계 정세는 급격히 바뀌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양이(洋夷), 즉 서양 열강과의 무력을 통한 만남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군에 의해 강화부가 함락되고 신미양요에는 미군에 의해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가 파괴됐다.

▲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병인·신미양요를 겪은 후 조선 정부는 염하 해안가에 포대를 여러 곳 설치해 서해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뱃길에 대한 방비를 강화함으로써 수도 방어의 거점으로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렇듯 강화는 13세기 몽골, 17세기 청나라, 19세기 말 프랑스와 미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간 그 자리에서 세계의 열강과 마주했다. 그런데 2015년 현재도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북한과 지척에 자리한 탓에 해안 요충지 곳곳에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우연치고는 꽤나 공교롭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강도지(江都志)

   
 

강도지는 조선후기 문신인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696년(숙종 22)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강화도에 있으면서 강화도 방비의 필요성을 숙종에게 올리려는 목적으로 저술한 읍지다. 2책으로 구성된 강도지는 강화 읍지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내용 또한 상세해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강도지는 현재 2본이 전한다. 하나는 이형상 수고본(手稿本) 강도지로 보물 652-4호로 지정돼 있고, 다른 하나는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수고본과 박물관 소장본은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우선 수고본은 상·하 2책으로 돼 있는 데 비해 박물관 소장본은 상·곤(坤) 2책으로 구성된 점이 다르다. 책의 내용도 박물관 소장본에 실린 부분이 수고본에는 빠져 있는 경우가 있고, 필체도 수고본이 보다 정서돼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초본의 내용을 수정해 정본이 만들어지는 예를 감안할 때 박물관 소장본이 수고본보다 먼저 쓰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형상은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1653년(효종 4)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疎巖村)에서 태어났다. 소암촌은 주안동 석바위 또는 동춘동 소암마을로 추정되고 있다.

1680년 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와 병조 좌랑(佐郞) 등의 내직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관리생활의 대부분을 경주부윤과 제주목사, 동래부사 등 외관직을 수행했다.

관직에서 사직한 후 오랜 기간 동안 경북 영천에서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은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해 142종 326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시문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733년(영조 9) 81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생의 마지막 5년을 인천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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