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곡 많은 고려극장의 끈질긴 여정

▲ 인형극단 단장 송 세르게이가 제작한 송 라브렌찌의 꼭두각시 인형.재주가 많다는 의미로 손이 여러개다.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극장은 193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설된 ‘원동변강조선극장’이다.
타향살이에 지친 동포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안식을 느끼게 해 준 원동변강조선극장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리장송, 최봉도, 리경희, 리함덕, 김 블라지미르, 최 따찌야나 등과 같은 출중한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들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는 희곡이 없었다면 극장의 존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성용, 채영, 리길수, 김해운, 태장춘, 김기철 등 민족의식이 강한 극장의 1세대 극작가들은 한국 고전을 각색하고 항일운동과 민족 계몽을 위한 희곡을 창작해 타향살이에 찌든 동포들에게 민족혼을 전파했다.

그러나 고려극장은 강제 이주로 인해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분리돼 이전되는 시련을 맞게 된다. 극장의 1세대 극작가들과 배우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준 높은 작품을 공연했고, 구소련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제 이주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로했다.

1950년 우즈베키스탄 극장이 카자흐스탄 극장으로 통합되면서 활기를 되찾기도 했지만, 재정 부족과 소련의 정치 상황에 따라 극장은 크즐오르다에서 우슈토베로, 우슈토베에서 다시 크즐오르다로 이전됐다가 1968년 알마티에 정착하게 됐다.

이때 1세대를 이어 모스크바영화대학 북한 망명 유학생들이 2세대 극작가와 배우로 공급되면서 극장은 활기를 되찾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진과 맹동욱이다.

▲ 강제이주 60주년 기념 연극 ‘기억’의 한장면.
이들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기존 1세대 극작가들과 달리 각본의 구성과 전개 방식, 인물 및 세태 묘사, 정치적·사회적 함의 등 어느 부분에서도 비교할 대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 제3세대 작가 송 라브렌찌의 등장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면서 체제와 질서가 무너지고, 연방이나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던 지원이나 협력이 끊기면서 극장은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됐다.

배우들이 흩어지고, 아리랑가무단의 가수와 무용수도 극장을 떠나면서 극장은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카자흐스탄과 수교를 한 모국에서의 작은 지원이 이어지면서 극장은 명맥만 유지해 왔다.

1997년 강제 이주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동포 사이에서 극장 재건 노력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영화대학 시나리오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영화계에 종사해 오던 극작가 송 라브렌찌가 극장의 총예술감독으로 부임했다.

송 라브렌찌는 고려인 강제 이주 60주년 기념 연극으로 리 스따니슬라브와 함께 ‘기억’을 창작해 무대에 올렸다. 이 희곡은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작품화한 것으로, 관객들과 여러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의적절하고 큰 울림을 주는 공연이라는 절찬을 받았다.

극장은 이듬해 서울국제연극축전에 참가해 이 연극을 다시 무대에 올려 한국의 관객들에게서도 큰 감동을 이끌어 냈다. 송 감독은 그 외에도 ‘농촌바보의 결혼식’, ‘김-희귀한 성씨’ 등 여러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극장을 부활시켰다.

# 송 라브렌찌의 생애
송 라브렌찌(Лаврентий Сон Дядюнович)는 1941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뒤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일반중등학교를 마치고 러시아 스베르들롭스크시 라디오통신기술대학에서 수학했다.

▲ 송 라브렌찌의 작품집.

그 후 바르나울시 지하 라디오통신 군수공장에서 기술설계자로 일하다가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과학아카데미 이온권 구역에서 근무했다.

1963년에는 작가의 꿈을 안고 모스크바영화대학 시나리오과에 들어가 수학했고, 졸업 후 카작필름(카자흐스탄 영화촬영소)에서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했다. 1976년부터는 예술영화 연출가로서의 일도 시작했다.

1989년에는 구소련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 창작예술단체 ‘너와 나’를 조직했으며, 1991년에 이를 다시 ‘송시네마’로 재편했다. ‘송시네마’의 다큐멘터리는 베를린·파리·로마·도쿄·서울·모스크바 등 여러 국제다큐멘터리축제에 초대받았고, 프랑스 파리국제다큐필름페스티벌(1991)에서 마리아 루스폴랴상을, ‘경험’으로 서울국제텔레비전축제(1992)에서 3등상을, ‘교장선생님’으로 프랑스 빌수르이온(Ville-sur-Yron) 제4회 국제다큐멘터리축제(2002)에서 1등상을, ‘인민의 원수’로 모스크바 제9회 국제텔레비전방송축제(2006)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카자흐스탄의 영화 발전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1997년 ‘공훈문화일꾼’의 칭호를, 2011년에는 ‘독립20주년기념훈장’과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카자흐스탄·러시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면서 러시아어로 글을 쓰는 여러 고려인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10권의 책을 편찬했으며, 자신의 작품을 모은 문학작품집 「송 라브렌찌 작품집」 2권을 간행하기도 했다.

# 송 라브렌찌의 작품세계
송 라브렌찌는 자타가 공인하는 카자흐스탄 최고의 시나리오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그가 만든 작품의 주제는 디아스포라(Diaspora)다. 자신 스스로도 이민자인 고려인 2세이기도 하지만, 1930∼1940년대 구소련의 강제 이주지로서 기능했던 카자흐스탄의 역사적 배경과 여러 민족의 이주자들을 따뜻하게 품어 줬

▲ 그랑프리를 차지한 다큐영화 ‘교장선생님’ 원본 필름.
던 카자흐스탄 민족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던 다큐멘터리 ‘고려사람’에서 그의 사조를 엿볼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인 우슈토베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로 우크라이나인, 쿠르드인, 러시아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고려말(우리말)을 사용하고, 심지어 개장(보신탕)을 먹기도 한다. 이렇게 고려인들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는 이민족들도 제목에서 밝혔듯이 고려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송 라브렌찌이다.

다음은 그의 대표 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영화 ‘교장선생님’은 송시네마와 일본 도쿄시네마가 공동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영화다. 이 영화는 한 교육자의 고민과 염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무대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중치르치크구역에 존재했던 ‘볼세비크’라는 집단농장이다.

주인공 윤 미하일 파블로비츠는 러시아-카자흐 중등학교 교장선생님이다. 윤 미하일은 행정을 담당하는 교장선생님이지만 학생들에게 수학과 물리학도 가르치고 있다.

볼세비크농장과 학교의 일상을 통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교육자의 길을 걸어가는 윤 미하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에 사용된 사진은 절친한 벗 안 빅토르가 제공한 것이다. 이 영화는 2002년 5월 프랑스 빌수르이론 제4회 국제다큐멘터리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영화 ‘약속의 땅’은 카자흐스탄 독립 20주년을 기념해 카자흐스탄공화국 문화부의 지원을 받아 송 라브렌찌가 시나리오를 쓴 장편영화다.

 1937년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우리 민족이 카자흐 원주민과 함께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 전시의 고난을 극복하고 카자흐스탄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우리 선조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가 가장 먼저 버려진 우슈토베다. 이곳을 기반으로 우리 민족이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카자흐스탄 민족총회 제16차 회의’의 장면이다. 즉, 예로부터 다민족 국가였던 다문화국가 카자흐스탄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 카자흐스탄 독립 20주년 기념 극영화 ‘약속의 땅’ 포스터.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교육열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는 우슈토베에 버려진 우리 조상들에게 첫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빵과 따뜻한 차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유르타(천막)로 안내한 카자흐인들의 따스한 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게 하는 영화다.

송 라브렌찌가 카자흐스탄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하고 끊임없는 도전의 결과다. 그는 구소련에서 소수민족 고려인이며, 더욱이 다리에 장애를 갖고 있는 청년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영화대학 시나리오과 입학면접에서 면접관들도 이러한 고려인 청년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 라브렌찌는 오히려 면접관들에게 추가 질문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알려 입학허가를 이끌어 냈다. 후에 이를 소재로 ‘추가질문’이라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재외동포들은 거주국 국민들에게서 때로는 노골적인, 때로는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성장한다. 그러나 동포들이 이러한 차별을 강인함과 성실함으로 극복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는 그 단면을 송 라브렌찌가 보여 주고 있다.
<글=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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