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엽 ㈔글로벌녹색경영연구원 교수 겸 기획본부장

 어릴 적 내용도 잘 모르면서 ‘젤소미나의 길(La Strada)’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주인공 안소니 퀸이 동행의 젤소미나를 구박하는 모습에서 뜻 모를 애잔한 감정과 북받치는 슬픔을 경험했으며, 길을 걷는다는 과정을 심각하게 생각해 봤다.

고교시절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또 한 번 걷는다는 의미와 방향성에 대해 깊이 있게 나름 생각하며 고심을 했었다. 어쨌거나 그 두 작품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미래에 대한 가슴 떨림과 생각의 힘, 방향과 절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내게 다가온 것이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GGMI 7기 원우 현장학습차 남원과 순창을 다녀왔다. 때맞춰 춘향제가 개막됐고 날씨마저 화창함으로 그 뒤를 이어줬다.

혼불문학관에서의 그 처연한 이야기들과 광한루에서의 길놀이패 오작교 건너기, 순창 강천산이 주는 깨끗한 경관을 가슴에 담고 지방 특산물이라는 잘 숙성된 고추장까지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내비게이션을 이용했지만 처음 본 낯선 도로는 혹 잘못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초조함과 긴장감이 동반된 운행길이었다.

 다행히 한 시간 정도 지나 자주 다닌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느긋하게 차를 운행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익숙하고 보다 빠르며 쾌적한 길은 모든 운행자의 바람인 것이다. 즉,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덜 쓰고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운행이라는 프로세스의 기본이라는 점이다.

더하여 지리산 뱀사골에서 들은 해설사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로웠다. 함양에서 산 몇 구비를 넘어야 올 수 있는 곳이 남원이었다면, 남원에서는 바로 올라가면 함양에서 올라오는 자리에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함양 사람과 남원 사람이 만나려 하면 남원 사람이 함양으로 가는 것이 훨씬 빠르고 힘이 덜 들었다는 것이다. 에너지총량을 기준점으로 잡을 때 어느 한 편의 노력과 희생으로 효율과 합리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구글의 혁신 방식 ‘moonshot thinking’ 이론이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다. 달을 탐색하려고 망원경 성능을 높이려는 투자와 노력 대신 곧바로 달을 향해 탐사선을 발사하는 것이 효율과 합리성의 진면목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혁신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의 여지없는 정곡에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다.

 다만 내 개인적 생각은 그러한 기술과학적 접근은 이제 더 이상 효율을 외치지 않아도 진화론적 입장에서 나날이 앞서고 발전해 갈 수 있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 효율성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것이다. 빠른 달성과 앞섦이 과연 발전이나 성장으로 귀결점을 잡을 수 있을까?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가는 마음은 산 몇 구비를 넘어도 그리움에 넘쳐 힘든지 모르고 길을 나설 수 있다.

인간이 만들고 재단한 몇 시간, 몇 ㎞같은 단위가 더 멀리 돌아가고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그런 계산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좀 늦어도 항아리에 담겨진 고추장 같은 숙성과 인내 역시 우리 삶의 중요한 자산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고급경영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갔던 와튼스쿨에서의 첫 강의가 생각난다. 명품 정신은 ▶올바른 판단을 위한 지혜 ▶옳다고 판단되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 ▶오랜 기간 인내하고 기다리는 숙성된 마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은행생활 내내 이 말을 새기며 느리게, 천천히 두 번, 세 번 생각하는 습관으로 이어지게 됐다. 흔치 않게 별다른 대과 없이 32년간의 은행생활을 마무리한 것 역시 이렇듯 천천히 숙성시킨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 덕분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길에서 효율과 숙성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걷는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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