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봄, 중구 개항장에 위치한 청일조계지경계 계단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공터에 상가 건물을 짓는 공사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될 무렵 구청 문화재 담당 직원과 관계 전문가들의 눈에 붉은 벽돌이 희미하게 드러난 모습이 들어왔다.

공사는 곧바로 중지되었고 그해 여름 정식으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조사를 마치자 남북 16.6m, 동서 13.7m 규모의 벽돌로 만든 건물의 뼈대가 드러났다.

그동안 기록과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과 인천에서 가장 큰 중국 요릿집이었던 중화루가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나마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 인천에 한국 최초의 호텔이 들어서다

▲ 대불호텔·중화루의 건물 터 발굴 전경.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일본과 청국, 서구인들이 배를 타고 드나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배에서 내린 외국인들에게 인천에 근거지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숙식 해결은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개항 직후에는 외국인을 위한 숙박시설이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아 외국 영사관에서 숙소를 제공하거나 소개해줬다고 한다.

 「인천부사」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인천항의 상황을 간파한 일본인 무역상이자 해운업자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1887년과 이듬해에 걸쳐 일본거류지 12호지(현 중앙동 1가 18번지)에 벽돌로 된 서양식 3층 건물을 지었고, 대불호텔(大佛ホテル)이라는 상호를 붙였다.

 풍채가 좋은 호리의 외모를 고려해 대불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하는 이 호텔은 1888년 건물이 완공한 후 영업을 개시했다.

그런데 1885년 인천항에 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회고기에 다이부츠(대불의 일본어 발음) 호텔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역시 같은 해 인천항에 온 영국영사의 기록에는 자신의 숙소가 일본인 거류지에서 단 한 채밖에 없는 이층집의 2층이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본다면 대불호텔은 1888년 이전부터 인천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들 외국인이 남긴 기록과 함께 여타의 자료에 보이는 정황 등을 종합해 볼 때 3층 벽돌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바로 인접해 2층의 목조 건물이 있었고, 그곳에서 1885년경부터 호텔영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목조 건물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불호텔은 인천항이 건설되기 이전 배를 대던 잔교(棧橋)에서 육지로 올라오면 바로 닿는 곳에 있어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서의 위치도 좋았다.

 「인천사정」에 따르면 당시 대불호텔의 객실은 11개였고 객실료는 상등 2원50전, 중등 2원, 하등은 1원50전이었다. 대불호텔의 숙박비는 당시 인천에서 큰 숙박시설이었던 이태(怡泰) 호텔이나 일본식 여관인 수월루(水月樓)보다 비쌌다. 그럼에도 외국인의 왕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대불호텔은 성황을 이뤘다.

 # 경인선 부설, 러일전쟁 그리고 호텔의 쇠락

 호텔은 영업을 시작한 후 10여 년간 호황을 누리다가 1899년 경인선이 완공되면서부터 쇠락

▲ 1897년 대불호텔 모습.
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하루 거리였기 때문에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배에서 내려 인천에서 하루를 머물고 가야 했다.

 하지만 철도로 1시간 30분이 걸려 갈 수 있게 되면서 숙박이 필요한 경우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호텔의 영업은 타격을 입게 됐다.

 게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호텔의 운영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전쟁 이후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영향 아래 있게 되자 인천을 찾는 서양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주 고객층이 사라진 대불호텔은 결국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는데 대략 그 시기는 1907년께로 알려졌다.

  # 대불호텔, 인천 바닥에서 제일 큰 중국요릿집이 되다

 호텔이 문을 닫은 후 3층짜리 벽돌 건물은 여러 사람에게 임대되다가 창업주의 아들인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가 중국인 뢰소정(賴紹晶)을 비롯한 중국 상인들에게 건물을 매각했다.

 호텔 건물을 인수한 중국인들은 1918년께 중국요리 전문점인 중화루(中華樓)를 열었다.

 당시 인천에는 공화춘(共和春)이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중화루는 개업을 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지면서 ‘인천 바닥에서 제일 큰 요릿집’이 됐다.

 중화루는 주사부 혹은 주대인이라 불리던 일급 주방장, 즉 요즘 유행하는 셰프를 북경에서 초빙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북경요리는 인천은 물론 당시 경성의 부자들에게도 소문이나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찾아왔고, 경성까지 요리를 배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화루가 성공하면서 쇠락했던 건물은 사람들로 다시 북적였다.

▲ 철거되기 전 중화루.

 당시 중화루와 공화춘 등 중국요릿집이 성업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천 화교사회의 변화가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서 중국인들의 세력이 위축됐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 산둥지역의 정치적 혼란과 자연재해, 가뭄 등으로 산둥 주민의 외국 이주가 늘어나면서 인천의 화교의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

 1910~20년대에 산둥에서 온 중국인들은 상당수가 쿨리(苦力)라 불리는 노동자들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난 만큼 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음식점과 가게들도 증가하게 된 것이다.

 # 요리집의 쇠락

 중화루의 전성기는 1931년 중국 장춘에서 벌어진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계기로 한국 내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충돌도 많아지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에는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면서 화교의 유입이 사라졌고, 1961년 외국인 토지취득 금지와 1962년 화폐개혁으로 화교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서 화교의 숫자는 차츰 줄어만 갔다.

 그 결과 60년대 이후 인천 청관(淸館)은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아이들과 관련한 괴담이 퍼질 정도로 거리가 한산해졌다.

 청관과 함께 중화루도 쇠락하면서 1970년 초 결국 문을 닫는다. 가게가 문을 닫은 후 건물에는 화교들이 세를 들어 살았고, 1978년 주안의 현 모씨가 호텔을 세우기 위해 1천400만 원에 건물을 매입한 뒤 철거했다. 중화루가 문을 닫은 후에도 건물 외벽에는 중화루라 쓴 커다란 간판이 여전히 걸려 있었는데 이 간판은 나중에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됐다. 중화루의 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남아있지만 건물은 철거된 후 어찌 된 이유인지 30여 년이 넘게 빈 공터로 있게 된다.

 지금은 땅속에 골격만 남아있는 3층 벽돌건물이 보여주는 흥망기(興亡記)는 매우 극적이다. 여태껏 우리는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한국 최초의 호텔, 인천 최대의 요릿집이었다는 흥미로운 타이틀에 주목하면서도, 정작 건물의 성쇠에 개항 이후 인천이 겪어왔던 변화의 과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천의 건축물 가운데 대불호텔과 중화루 건물만큼 13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천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싶다.

▲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대불호텔의 영화와 몰락은 인천이 개항 이후 서양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항구에서 경인선 개통으로 외국인들이 거쳐 가는 관문도시로, 다시 러일전쟁 후에는 일본의 식민도시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화루의 흥망도 청일전쟁으로 쇠락했던 인천 화교사회가 1910년대부터 중국 노동자의 유입으로 다시 북적이다가 쇠락의 길을 걸었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다가오는 가을, 시간을 내서 차이나타운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고 건물터 앞에서 지나온 노정을 잠시 상상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듯하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중화루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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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화루 간판이다. 그중 하나는 가로로 긴 판자 4개를 붙인 후 그 위에 ‘中華樓’를 새겨 넣었다. 판자는 노란색 페인트로, 글자는 검은색으로 칠했는데 검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상호를 쓴 공화춘 간판과 반대인 점이 흥미롭다.

 상호 오른쪽에는 임술중춘(壬戌仲春)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 간판이 1922년 음력 2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화루 글자 주위로는 기명절지(器皿折枝), 즉 꽃 가지와 과일, 문방구 등의 문양을 노란색 페인트가 마르기 전 찍어냈다. 이 간판은 중화루 1층 출입구 위에 부착돼 있던 것으로 크기는 가로 2.3m 세로 1.3m다.

 다른 하나는 삼각형 모양의 간판으로 길이 3.5m, 높이 1.1m로 대형이다. 중화루 2층과 3층 사이에 장식용으로 걸려있던 이 간판은 크게 3매의 판재를 이어 판을 만들고 삼면에 테두리를 둘렀다. 좌우 상단 테두리에는 구름문양의 장식을 부착했다.

 판자 중앙 상단에는 원형 목재를 부착하고 그 위에 금속으로 ‘新’ 자를 오려 붙였다. 그 아래에는 좌우로 각각 1마리의 용이 마주 보며 구름 위를 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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