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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우 고려대 연구교수
5개월 전에 이순신 신드롬을 각인시킨 KBS 1TV의 ‘불멸의 이순신’이 30회로 축약해 종영했다. ‘명량’이라는 영화가 대한민국 국민의 반이 볼 정도로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후 더 자세한 메시지를 주는 이순신 사극을 재편집해 방영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필자는 외부 일정 중에도 한 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에 오후 11시까지는 들어올 정도로 다시 그 사극을 열심히 봤다. 학교 수업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학생들에게 시대정신에 대한 강의를 했지만, 진실과 정의가 통용되는 국가 건설, 국제사회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1590년대의 임란 시 조선시대 역사와 명나라와 왜가 대립하던 동아시아 역사의 전개에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특히나 5개월 전 마지막 회서 보여 줬듯이, 이순신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극에 달하고 선조의 왕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참지 못한 선조의 소인배적인 이순신 추포령에 사직서를 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직언을 하는 유성룡의 충성심은 필자를 가슴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고위공직자의 도리일 것이다.

이렇게 얄팍한 황금만능주의와 편의주의가 가장 값진 정신적인 문명을 파괴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주는 파장이 매우 크게 느껴지는 유성룡의 절박한 충언이 과거 밤 내내 필자의 가슴에 울려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도 나름의 소명감으로 한국 정치를 개혁하겠다고 이 험난한 길을 걸으면서 느낀 좌절과 아픔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성공하지도 못한 지금까지의 여정이지만 그 정신만큼은 강하게 갖고 글로라도 남겨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다.

 노량해전의 출전을 포기하고 명나라 수군장수 진린과 함께 왜군의 퇴로를 열어 주라는 선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전한 이순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 만고의 충신 유성룡은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충언을 서슴지 않는다. "전하, 이순신은 만고의 충신입니다. 충직한 신하의 진실을 왜곡하고 믿지 못하는 군주는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의 충정을 의심치 말고 믿고 기다리십시오. 오히려 추포돼 단죄돼야 할 사람들은 이곳 대전에 있는 중신들입니다.

이순신이 온몸으로 이 나라의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구하려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해전에서 바다를 지킬 때에, 여기에 있다는 대다수의 중신들은 이러한 전란이 도래된 책임을 지기는커녕 전란의 와중에서도 남을 탓하고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면서 오히려 이순신과 같은 충신을 역도로 몰고 그 잘난 파당의 이익만을 좇으면서 보신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순신을 체포하기 전에 이곳에 있는 중신들부터 책임을 묻고 체포해 단죄하는 것이 순리에 맞는 것입니다. 소인도 죽여 주시옵소서." 대충 이런 내용의 충언을 드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을 전율케 하는 진심과 충정의 울림이던가?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러한 진실과 정의감을 가진 리더가 있는 것인가? 21세기 이순간에도 유성룡, 이순신과 같은 만고의 충신이 권력의 핵심에서 지도자를 보필하고 나라를 운영한다면 지금과 같은 전략 부재로 남남갈등이 횡행하고 국민들의 나라사랑이 식어가면서 국가에 대한 미래의 전략이 무엇인지 불확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만 있고 그릇이 적어도 안 될 일이다.

 선조는 유성룡의 이러한 충언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이순신과 유성룡은 만고의 충신이지만, 유성룡을 파직하고 이순신을 압송하라"는 아주 소인배적인 처신으로 오늘날도 평가를 못 받는 조선의 군주가 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선조왕권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세자 광해군이 가슴 아파하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격론이 조정에서 일고 있을 시 이순신은 조선 백성들을 동물처럼 죽이고 수탈한 만고의 원수 왜군들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와중에 왜병이 쏜 조총탄에 가슴을 맞고 나라사랑 백성사랑의 유언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드라마는 이순신 못지않는 충성심과 강직함을 보여 준 정운, 이영남과 같은 인물의 기개를 잘 보여 줬다. 참으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의 인물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슴이 메이는 그 무게감을 주체하기가 쉽지 않아 수업 후 이렇게 이 잔잔한 감동을 글로써 남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어찌 그 위대한 정신을 대체한단 말인가? 지금의 4·13 총선 정국에서 이러한 큰 인물이 안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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