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魂)이 서리지 않고서야 어찌 터 센 그곳을 그토록 검푸름으로 드리울 수 있으랴.

그저 시간이 가져다준 밑동 굵은 생명체였다면 정녕 그 모진 고난을 몸으로 녹여 내지 못했으리라.

그 정령(精靈)은 필시 한민족의 얼과 닮아 있을 게다. 가냘퍼서 서러웠던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침략의 포탄에 살이 찢겨 나가면서도 오롯이 민족의 자주성을 일으켜 세웠다. 제국의 총포에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가는 민중을 감싸안고 스스로 방패가 됐다. 살신성인(殺身成仁)에 닿아 있는 처절한 구국(救國)의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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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 소나무
강화수로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 대명리와 마주한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초지돈대(사적 제225호). 쓰라린 역사가 배어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돈대의 성곽을 짙푸름으로 드리우고 있다.

키 11m에 둘레 2.8m 소나무의 줄기에는 140여 년 전의 상흔 또한 뚜렷하다. 구한말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 사건(1875년)의 아픔이다.

 소나무 나이는 대략 400년 정도다. 1656년(효종 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초지돈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는 굵은 줄기와 위로 솟구쳐 여러 갈래로 뻗는 모양으로 가지가 늘어지면서 삿갓모양으로 처져 아름다운 수형을 하고 있다. 생육 상태도 양호하다, 이 희귀 노거수는 생물학적 가치는 물론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초지진은 해상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한 요새다. 고종 3년(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로즈) 극동함대와 고종 8년(1871년)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로저스) 아세아함대, 고종 12년(1875년) 8월 침공한 일본군 운양호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다.

 당시 초지진에는 명마참절제사 1명과 군관 11인, 군사 320인, 건선 3척이 주둔했다. 한양으로 이어지는 뱃길 강화해협이 있어서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 배의 출입이 금지돼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조선 정부는 해협 입구에 외국 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를 세우고 외국 배의 통항을 금지했다. 심지어 내국선도 노인(路引·항행권)이 없이는 항행을 금했다.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침입해 탐측 활동을 벌이는 것은 엄연한 영토 침략행위이고, 주권 침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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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성보에서 본 강화와 강화해협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했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과 맞서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했다. 진 안에 있던 군사시설물과 40여 문의 대포는 미군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당시 미군 솔레이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낡은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렬히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군함 운양호의 침공은 인천의 개항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강압으로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인천을 포함한 원산과 부산이 개항하게 된다. 우리나라 주권을 상실하는 계기였다.

 초지진은 폐쇄된 채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다가 1973년 초지돈만 복원됐다. 높이 4m, 장축 약 100m의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와 총좌 100여 개가 있고,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 안에 전시돼 있다. 이 대포는 조선시대 후기 사용됐던 실물이다. 당시 대포 중 가장 대형 규모는 2.5m 길이의 홍이포로 일제 관리 사택의 기둥으로 사용됐던 것을 제자리로 찾아 옮긴 것이다.

 이 두 소나무는 열강의 침략에 맞서 장렬하게 싸운 선조들의 기상을 간직한 채 400년 동안 초지돈대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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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풍’과 ‘손돌목 추위’라는 옛말이 있다. 모진 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강화군 길상면 광성진과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험악한 수로인 손돌목에서 유래한다.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대동미(大同米)가 서울 한양으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해상로가 바로 손돌목이었다. 해운으로 운송되면 대동미는 서구 원창동 ‘갯말’ 전조창(轉糟倉)에서 밀물 때를 맞춰 손돌목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용산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손돌목은 범인(凡人)들의 왕래를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수로 바닥에는 사슴뿔 모양의 암초가 수도 없이 깔려 있었고, 소용돌이 치는 여울 탓에 노련한 사공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물이 밀려왔다가 쓸려나가기까지 만조 시간은 5시간 남짓하고 바닷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 수위가 가장 높은 ‘사리’ 때 수심이 고작 5.5m 남짓했다. 수심이 가장 낮은 ‘조금’에는 평균 수심이 4m에 불과했다.

 김포면 대곶면 신안리 덕진포대지 돌출부에 ‘주사손돌공지묘(舟士孫乭公之墓)’라고 새겨진 손돌목 일화는 이렇다.

 1231년 고려 고종이 몽고의 난을 피해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앞은 꽉 가로막혀 보이지 않고, 물살은 워낙 사나워 배가 조리질쳤다. 사공 손돌이 노를 젓는 배는 곧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고종은 "사공이 나를 죽이려 한다"며 크게 화를 내며 "손돌의 목을 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손돌은 죽기 직전 뱃머리의 바가지를 바닷물 위에 띄우며 "뱃길이 위험하니 내가 죽더라도 바가지를 좇아 노를 저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주검이 된 손돌을 강가에 묻자 하늘에는 먹구름이 뒤덮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배는 미친 듯 가랑잎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고, 죽은 손돌의 뒤를 이어 노를 잡은 사공은 아연실색 기가 질려 제대로 노를 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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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했던 고종은 손돌의 유언대로 바가지를 따라 노젓기를 명했고, 천신만고 끝에 험난한 여울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서울로 환궁한 고종은 손돌의 무덤 앞에 사당을 짓고, 손돌이 죽은 10월 20일에 제사를 지내 원혼을 달랠 것을 신하들에게 명했다. 공연히 의심해 손돌을 죽인 참회의 뜻이었다. 현재 손돌의 묘지에 세운 사당은 오간 데 없고, 김포시가 세운 묘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이 손돌목은 굴포(屈浦)와 무관치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 대규모 물량 수송 수단은 수운이었다. 하지만 한양으로 이르는 손돌목의 험난한 여울로 배가 난파되기 일쑤였다. 이 피해를 덜기 위한 방책이 인천 앞바다에서 한양을 곧장 연결하는 새로운 수운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경인 아라뱃길이다.

 경인 아라뱃길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강을 파기로 처음 구상한 때는 고려 고종 780년 전의 일이다. 실제 한강변 신곡리에서 부평 뜰을 가로지르는 24㎞ 수로를 곧장 뚫어 직포(直浦)를 내고, 서해 인천교 갯골창에서 부평 원통이 고개 앞까지 국책사업으로 굴포 공사를 한 것이 470여 년 전인 조선 중종 때의 일이다.

 인천시 서구 백석동에서 김포시 고촌면 전호리까지 길이 18㎞, 폭 100m, 수심 6m의 수운을 건설한 국책사업인 경인 아라뱃길은 800년 전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

 글=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사진=강화군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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