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북부의 지도를 바꿔 놓은 청라 매립지. 그 땅에는 영욕의 반세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굴절된 현대사의 아픔도 묻혀 있다. 가진 자들에게는 끝 모를 허기(虛氣)를 채우는 탐욕의 땅이었고, 없는 자들에게는 하염없는 배고픔 속으로 몰아넣는 수렁이었다.

애초 청라 매립지는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갯벌을 매립한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전국에서 모인 빈자(貧者)들은 곯은 배를 움켜쥐며 등가죽이 벗겨지면서도 돌과 흙을 날랐다.

하지만 10여 년에 걸친 노역의 대가는 빈털터리였다. 대신 헐벗은 자들이 쌓아올린 제방과 간석지는 부패 세력과 결탁한 동아건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그 과정에서 온당치 않은 부를 축적한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수탈의 땅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한국농어촌공사가 삼켰다. ‘경제자유구역’이라는 이름으로 더 큰 탐욕의 땅으로 컸다. 본보는 연속 기획 ‘영욕의 땅, 청라 매립지 그 진실은’을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을 추적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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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 년 전 주민 자조근로사업으로 매립된 청라도 갯벌(왼쪽)이 경제자유구역으로 변해 고층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다. <사진=‘인천의 어제와 오늘’ 김식만 씨·인천사진공동취재단 제공>
1963년 7월 25일 전라도 출신 수산업자 김옥창(2000년 사망 당시 71세)씨와 황해도 출신 월남인 윤차웅(93·인천시 중구 중산동)씨는 축제식 양식장 조성을 위한 서구 경서동 청라도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농림부에 신청했다.

매립 공사에 정부의 양곡과 물자 등의 지원을 받고, 대신 매립 갯벌을 공사 참여 주민들에게 나눠 주는 조건이었다. 이들이 세운 ‘한국천해개발공사(이하 공사)’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로부터 자조근로사업장으로 지정받은 터였다. 인천시 역사자료관이 2009년 12월에 펴낸 「인천의 갯벌과 간척」에도 공사에 참여한 청라도 등지 주민들에게 9천900㎡(1정보)씩 나눠 주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김 씨와 윤 씨는 자금력이 달리자 이듬해 6월 자금을 투입해 매립 공사를 빨리 끝내겠다는 조건을 내세운 새 사업자와 동업 계약을 맺고 공사 대표를 맡겼다. 1964년 9월 9일 농림부의 청라도 갯벌 1천64만㎡ 매립면허 승인이 떨어졌다.

공사는 청라도 매립을 미국 지원의 밀가루를 공급하는 ‘난민정착사업(미480-2)’으로 공고하고 전국적으로 인부들을 모집했다. 청라도 현지 주민 56가구를 포함해 2천여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 주민들은 길이 6천930m의 제방을 쌓고 물막이 공사를 벌였다. 하지만 건설부는 준공을 두 달 앞둔 1970년 12월 청라도 간척지를 공업지구로 바꾸고 ‘1년 이내에 도로배수시설과 해발 10m 높이로 추가 매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는 주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설부는 1971년 4월 청라도 주민들에게 ‘준공일 연장은 불가하다’며 ‘대한준설공사와 함께 합작하라’고 통보했다.

정부 지시에 따라 주민들과 약정서를 맺은 대한준설공사는 예산과 장비 문제 등을 이유로 공사에 손을 뗐다. 1972년 10월 매립면허마저 취소됐고, 그 소유권이 대기업인 동아건설로 넘어갔다. 땅 한 평 받지 못하고 공사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10여 년 벌이고 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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