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명절이 명절 같지가 않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이 나지 않고 재미도 없다. 아니, 기다림에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참 더럽게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치열하게 살아온 후유증이거나 아니면 내 머리가 돌이라서 그렇다. 후자로 하자. 무거워 가누기 힘든 목을 애써 받쳐 들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건대, 명절이 기다려지고 신났던 건 결혼 전이 아니었나 싶다. 의리가 충만했던 시기. 빗발치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위해 달려 나와 주는 친구와 선후배에 둘러싸여 있었던 기억이다.

그땐 외지에 나가 있던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달력의 날짜를 하루하루 지웠다. 친구들은 한잔 하자는 연락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 나왔다. 죽을 때까지 변치 말자며 한 선후배들과의 어깨동무는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풀리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하나둘 결혼해 자식을 키우게 되면서 친구와 선후배들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됐다. 술이 술을 부르던 ‘원샷’ 구호는 ‘여기까지’가 대신하게 됐고, 북쪽 나라 어린 돼지를 당장이라도 때려잡을 만한 호기도 점점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또 가족을 향한 무한한 책임감은 ‘내가 쏠께’를 외치던 객기를 곁눈질을 동반한 ‘갹출’, 또는 쉴 새 없이 울리는 마누라 전화 벨소리를 전조증상으로 하는 ‘행불’로 바꿔 놓았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변치 말자던 의리의 맹세는 군 전역 후 바로 잊게 되는 ‘암기사항’이 됐다. 언제부턴가 이들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노래 제목처럼 ‘아 옛날이여’다.

이번 추석 전날 저녁, 친구 여섯 놈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학창시절 에피소드를 흘러간 옛 노래 메들리마냥 풀어놓더니만, 근처 술집으로 가 주님을 영접하잔다. 잇몸 염증이 심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방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켜보며 오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다. 7일이 지난 현재. 지옥가기보다 싫은 치과에서 독립투사가 경험했을 법한 지독한 고문을 당한 후 더 독한 약을 먹게 됐다. 방금 알약을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입가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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