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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방을 쌓기 위해 가마니에 흙과 돌을 넣는 자조근로사업장 인부들.<사진= 사진으로본 봉덕학원 50년>
헐벗고 굶주렸던 1960년 대 초였다. 인천시 북구 경서동 국가 소유의 섬에 살고 있던 청라도 50여 가구의 가난은 하염없었다. 가난과 진정으로 사귈 수 없는 자들이 빈곤의 문제를 꺼내거나 배고픔을 동정의 꼬투리로 삼으려는 어설픈 몸짓을 한순간에 죄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처절한 가난이었다.

 가난을 자신들의 운명 안으로 담담이 받아들인 채 가난으로써 삶의 내용을 채워가던 청라도 사람들에게 1960년 3월 귀인(貴人)이 찾아들었다. 일본서 수산업을 했던 김옥창(2000년 사망)씨와 그의 동업자 윤차웅(93·인천시 중구 중산동)씨였다. 김 씨 등은 청라도 앞 바다에 수산양식면허 2건을 얻고, 일본의 수산양식 기술자를 데려와 3년간 양식 생산사업을 벌였다. 한국산 선어를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청라도 주민들은 천주교 부평성당의 미국인 변로이(Roy.d.petipein) 신부가 공급하는 구호양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김 씨는 1963년 10월 24일 수산양식 목적으로 청라도 앞 경서동·원창동 갯벌 1천425㏊에 대해 공유수면 매립면허 허가를 신청했다. ‘조수간만의 차(9m 이상)가 큰 지역에서는 제방을 쌓아 양식을 하는 방식이 적합하다’는 일본인 기술자의 자문이 있던 터였다. 연안어업권을 포기한 채 제방 축조공사에 매달려야만 했던 청라 주민들에게 9천900㎡(1정보)씩 나눠 주겠다는 조건도 달았다.

 이어 제3공화국 당시 공화당 영등포구 지구당 위원장인 이명수(당시 45세·1990년 사망) 봉덕학원 이사장이 나타나 거래를 시작했다. 김 씨와 이 씨는 이듬 해 2월 16일과 6월 10일 두 차례 만나 협의했다.

 이 씨는 청라 앞바다 간척공사 회사인 한국천해개발공사의 대표를 맡는 대신 정부의 구호 물자를 더 끌어내겠다고 약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향인 김 씨는 군사 정부에 밉보일까 두렵기도 하고, 사업 밑천이 다 떨어져가다 보니 이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청라 주민들의 토지 분배 약정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 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천해개발공사의 대표 명의를 바꿔 1964년 9월 9일 공유수면 매립(1천275㏊)면허를 농림부로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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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게로 돌을 옮겨 바다를 메우고 있다.<사진= 사진으로본 봉덕학원 50년>
"자조근로사업장인 청라 간척사업에 전국 각지의 영세민들이 모여 들었어요. 배곯던 시절 밀가루 배급이라도 탈 요량이었죠." 화약류관리기사 2급 자격증으로 화약 주임과 현장 소장을 맡았던 동업자 윤 씨는 한때 근로자가 2천 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근로 영세민들에게는 미공법 480-Ⅱ에 따라 가구 당 50㎏의 밀가루와 옥수수가 분배됐다.

 미군의 직접적인 도움도 있었다. 미인천항사령부는 LST함정(상륙정)를 동원해 돌을 실어 날랐다. 주한 미군 76공병대대는 AID중장비인 불도저 3대와 트럭 5대, 크레인 2대 등을 지원했다.

 인천시는 1965년부터 3년 간 700t의 밀가루을 내주었고, 1967년에는 미공법480호(II)에 의한 양곡 400t도 주었다. 경기도는 수문 제작비로 100만 원을 보조했다.

 청라 간척사업은 순조로웠다. 전체 공정의 90% 정도를 남겨 놓은 1969년 7월 18일 인천시 북구청(갑) 박효익 청장은 청라 매립사업 면허권자로 자조근로사업장 대표인 이 씨(을)와 「토지분배계약서」를 맺었다.

 토지분배계약서 제2조에는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에 의거해 본 사업에 참여한 영세민의 자립을 조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제3조는 ‘토지분배 비율은 정부 지원 양곡 또는 자재비 투자 배율에 의거해 분배 대상자에게 분배하고, 사업장 대표(이명수)는 자기투자비율에 의거해 분배한다’로 규정했다.

제5조는 ‘분배 대상 영세민의 선정은 당시 관내(주민등록에 의거해 확인된 자) 거주자로서 사업장에 참여한 실적과 생계 정도 및 자립 의욕 등을 감안하여 구청장이 결정한다’라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청라 간척사업은 1970년에 들어오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건설부는 매립 목적을 공장부지로 바꾼 뒤 준공 기한 2개월여를 앞둔 1970년 12월 19일 매립공사 계획을 변경했다. 매립 표고를 10m까지 매립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매립 토석만도 2천700만㎥가 필요해 준공 기한(1971년 1월 30일) 내 완공은 불가능했다. 건설부는 면허기간 연장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세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청라 매립 간척사업은 1971년 5월 11일 민간인의 손을 떠나 국유화 단계를 밟았다.

# 미국 구호물자 간척사업 버팀목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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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제공된 미국 구호물자의 근간이다. 정식 명칭은 미국의 ‘농업 수출 진흥 및 원조법(Agricultural Trade Development and Assistance Act, Public Law 480)’이다. 미국의 농산물 가격 유지와 저개발국 식량 부족 완화를 위해 잉여농산물을 각국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우리나라는 1955년 미국과 협정을 체결해 1956년부터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미공법 480 제2관(Ⅱ)은 2개 조로 규정됐다. 기아 구제나 긴급사태를 위한 긴급 원조로 가난한 국민에게 상품금융회사가 보유한 잉여농산물을 증여할 것(201조)과 우호국의 경제 및 지역사회 개발을 위해 잉여농산물을 증여할 것(202조) 등이다.

 청라 매립지 자조근로사업장에 참여한 영세민이 품삯으로 받은 밀가루가 여기에 속한다. 이 밀가루는 ‘480 밀가루’, ‘악수표 밀가루’ 등으로 불렸다. 미공법 480에 따라 제공된 구호물자 밀가루 포대에 태극기와 성조기 아래 악수하는 두 손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근로자조사업장에서 하루 일당으로 받을 수 있었던 밀가루는 가구 당 3.6㎏(120원)이었다. 한 달 근로일수는 20일 한 달에 받을 수 있는 밀가루는 총 72㎏이었다. 공법480에 따른 구호물자 지원은 1981년에 종료됐다.

#청라 매립(간척)사업 추진 일지
 
 ▶1963. 10. 24 : 수산양식목적 공유수면 1천425㏊ 매립허가 신청
  (김옥창→농림부)
 ▶1964. 02. 16 : 주민대표와 이명수간 동업계약서 체결
 ▶1964. 06. 10 : 면허신청자 명의 변경(김옥창→이명수)
 ▶1964. 09. 09 : 공유수면 1천275㏊  매립 면허 취득
  (농림부→이명수)
 ▶1964. 09. 10 : 매립공사 착수
 ▶1964. 09. 15 : 보건사회부로부터 3년간 매월 미국의 무상 원조로
   양곡, 물자의류 지원 약속
 ▶1968. 02. 16 : 건설부 매립목적 변경 허가(수산양식→공장부지
  조성)
 ▶1968. 02. 16 : 매립면허 허가권자 변경(농림부→건설부)
 ▶1969. 07. 18 : 토지분배 계약서 체결(북구청장→대표 이명수)
 ▶1971. 05. 11 : 건설부에 매립 기한 연장 신청
 ▶1971. 05. 11 : 건설부 매립면허권리 토지 권리양도양수 허가
  (이명수→대한준설공사)
 ▶1972. 10. 31 : 건설부 대한준설공사 매립면허 취소 국유화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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