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근로사업장이었던 청라 매립사업에는 정착과 자립으로 통하는 ‘자조(自助)’는 없었다. 다만 ‘480 밀가루’로 굶주린 배를 달랜 곤궁한 자들의 ‘근로(勤勞)’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죽을 둥 살 둥한 노역(勞役)이 일군 간척의 땅은 힘 있고 가진 자들의 차지였다. 빈자(貧者)들에게는 생명 줄과 같았던 미국의 원조와 정부의 구호 양곡은 미끼였다. <관련기사 16면>
1969년 7월 18일 박효익 인천시 북구청장(갑)은 청라 매립사업 면허권자로 자조근로사업장 대표인 이명수 봉덕학원 이사장(을)과 ‘토지분배계약서’를 맺었다.

이명수 대표는 1964년 9월 9일 인천시 원창동·경서동 해면 1천262만5천500㎡(382만5천 평)을 수산증식 양어장 조성장으로 농림부 장관(차균희)에게 면허를 얻어 2천여 명의 근로 영세민을 동원해 공유수면을 매립해오던 상태였다. 토지분배계약서 체결은 1968년 7월 23일 공포된 ‘자활근로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시행에 따른 조치였다. 이 법은 미공법 480-Ⅱ에 따라 미국의 원조로 정부가 지원하는 근로 구호양곡의 관리 체계와 토지분배 원칙 등을 제시하고 있다. 토지분배계약서는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에 따른 청라 매립사업의 간척 토지는 정부의 지원 양곡과 자재비 투자비율에 따라 근로 영세민들에게 분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분배 대상 영세민 선정은 관내 거주자로 자조근로사업장에 참여한 실정 등을 감안해 북구청장이 정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1971년 4월 30일 공유수면 매립면허권이 정부 산하기관인 대한준설공사(사장 김재현)로 넘어가면서 자조근로사업장에 참여했던 영세민들은 땅 한 평 받지 못했다. 지나간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1960년대 청라 매립사업 근로자에게 ‘자조(自助’는 한이 서려있는 ‘자조(自嘲)’로 남아 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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