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 근로자들에게 땅을 주기로 매립사업자들이 맺은 계약은 정부의 규정에 근거한 것이지 결코 사업자 개인 간의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윤차웅(93·인천시 중구 중산동)씨는 억울함을 내비쳤다.

 52년 전 청라도 매립사업의 토지 분배 문제가 해결 기미 없이 단지 민간인 간의 계약 따위로 폄하되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에서다.

 윤 씨는 청라도 매립지(1천275㏊) 공사 현장에서 화약주임과 현장주임을 맡았던 ‘청라 매립의 살아있는 역사’다. 처음부터 끝까지 10여 년을 청라도 매립사업과 함께했다.

 "청라도 매립사업은 엄연한 자조근로사업장이었습니다. 미국 민간구호단체인 (‘CARE’를 잘못 발음한) ‘케아’가 미공법 480-Ⅱ에 따라 밀가루를 지원한 토대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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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라매립사업 화약 및 현장 주임이었던 윤차웅(93) 씨와 단순 근로자 정정기(83) 씨, 목수로 일했던 김준완(90) 씨(왼쪽부터)가 당시 계약현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근로 영세민의 땅 분배 문제를 개인 간의 계약이라며 대한민국 정부가 딴청을 피우고 있다고 반박한다.

매립사업에 참여했던 청라도 주민들은 1987년 6월 대책위원회를 발족한 뒤 20여 년간 청와대와 농림수산부와 청와대, 인천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등에 토지 분배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청라도 매립은 1981년 1월 14일 새 면허를 얻어 공사를 벌인 동아건설의 사업으로 청라도 주민들이 주장하는 최초의 매립권을 인정할 수 없다’식의 답변만 있었다.

사실 동아건설의 청라 매립은 자조근로사업으로 영세민들이 이미 쌓아 놓은 제방에 얹힌 사업에 불과하다.

 "매립이 한창이었던 1967~1968년 사이 미군은 개발원조(AID)로 불도저 3대와 트럭 5대, 크레인 5대를 지원했어요. 미 인천항만사령부는 상륙정(LCU)까지 동원해 매립사업을 도왔습니다. 우리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단순 민간사업에 미군의 중장비가 동원될 수 있습니까?"

 보건사회부는 ‘미공법 480 제2관 202조 식량에 의한 1964년도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을 근거로 1965년 7월 29일 ‘미공법 480 제2관 202조 양곡에 의한 1965년도 한·수해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도 내놓았다. 자조근로사업의 목적과 종류, 취로자 선정 기준, 양곡 분배 방법, 노임, 장차 조성될 농지에 대한 분배 기준 등을 담고 있었다.

 토지 분배는 ‘당해 구청장·시장·군수는 본 사업으로 새로운 농지가 조성되었을 시는 취로한 영세민 및 영세 농민 중 빈공 순위에 의하여 농지 분배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규정했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영세민에게는 전(밭) 또는 답(논) 9천900㎡를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라도 매립사업에 목수로 일하면서 단순 근로자들보다 3배 정도 많은 밀가루를 탔어요." 김준완(90·인천시 서구 경서동)씨의 증언은 당시 규정에 비춰 볼 때 정확했다.

 자조근로 실시 요령에는 목수 등 기술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반 근로자의 밀가루 하루 분배량(3.6㎏)의 3배인 7.2㎏을 주도록 했다. 김 씨는 목수 기술자로 당시 장도(노루섬)~일도~청라도~문점도 간 제방 사이의 수문 3군데 공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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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을 잇는 청라지구 물막이 공사 모습.
<사진 = 봉덕학원 50년사>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은 1968년 7월 23일 공포된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하 임시조치법)에 구체화됐다. 1965년과 1967년 보건사회위원회가 국정감사에서 자활지도사업으로 생기는 토지 분배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을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또 자조근로사업장에 지원되는 양곡이 근로 영세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돈으로 바뀌어 엉뚱한 데 쓰인다는 미국 대외원조기구인 ‘유솜(USOM)’ 측의 적발도 있던 터였다.

 임시조치법 제6조는 ‘토지 분배는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근로 구호의 대상자(영세민)에게 우선적으로 무상 분배할 수 있다’라고 정했다. 제9조에는 ‘노임으로 지급될 양곡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교환·매매하거나 기타의 처분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토지(농지) 분배는커녕 사업 막판에는 밀가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정정기(83·인천시 동구 화수동)씨는 군대 제대 후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청라 매립사업장에서 단순 근로자로 일했다.

 소쿠리로 흙과 자갈을, 지게로 돌을 담은 가마니를 날랐다. 분배 대상 땅 9천900㎡는 고사하고 자조근로사업 실시 요령이 정한 밀가루 하루 분배량인 3.6㎏에 턱없이 모자란 한 달 50㎏을 받으면서 말이다.

#미국 민간구호단체 ‘CARE’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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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년 7월 9일 조지테일러 케어 한국파견단장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자료=국가기록원 제공>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교전국의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 민간구호단체다. 설립 당시 ‘유럽구제협회’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 전장(戰場)인 유럽에서 구제활동을 벌였으나 1952년 명칭을 바꾸고 대상 지역도 넓혔다.

 이 단체는 전란국(戰亂國)이나 저개발국의 개인 또는 단체에 구제품을 증여했다. 품목은 주로 미공법 480에 따른 잉여 농산물이었고, 의류·문방구·의료품이나 산업기구까지 다뤘다. 우리나라에는 1948년 파견단을 보내 극빈 아동 급식과 농촌 개발을 위한 식량을 원조했다.

 한미 양 정부는 1955년 5월 2일 ‘민간구호 활동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협정의 주 내용은 ‘민간이 기증하는 물자는 민간단체가 취급한다’였다.

 한국전쟁 중이나 직후 미국 민간으로부터 기증받은 구호물자도 ‘군사상 필요’ 목적에 따라 정부 기관을 통해 주고받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민간구호단체는 미국 시민의 자발적인 기증 의욕을 꺾는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이를 양 정부가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우리 정부는 비영리 민간단체에서 도입하는 미국 민간 구제품의 배당과 분배에 참여하지 않았다. 관세나 기타 세금도 물리지 않았다. 물자의 배당과 분배에 참여했을 경우 우리 정부는 수송비 등 조작비를 내야 했다.

 1958년 당시 등록된 민간 구호단체는 79개였다. 이 중 조작비를 받는 큰 단체는 ‘케어’와 세계기독교봉사회, 천주교구제위원회, 전재고아양친회, 세계구제위원회 등이었다.

 외국 민간단체들이 취급했던 많은 양의 잉여 농산물을 구호 목적 이외에 이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케어를 포함해 기독교봉사회와 천주교구제회 등의 대표는 보건사회부 내 위원회를 구성해 구호 양곡을 조절하고, 시·읍·면장을 통해 구호대상자를 선정하도록 해 목적 이외의 사용을 막았다.

 케어는 1955년 1월부터 1958년 7월까지 미국 잉여 농산물 213만6천492t을 국내로 들여왔다.

 정부는 사업에 대한 일관성과 실효성이 떨어지자 이들 민간단체가 해 오던 구호사업 중 자조근로사업, 학교급식, 일반 영세민 구호, 모자보건 등 4개 사업을 1966년부터 직접 맡기로 결정했다.

 이 단체는 1979년 6월 11일 종결식을 열고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를 마쳤다. 당시 케어 본부 애드윈 J. 웨슬리 회장은 "한국민은 이제 다른 나라를 도와줘야 할 만큼 생활이 윤택해졌다"고 말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사진 설명>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장이 1962년 7월 9일 조지 테일러(George B.Tayor) ‘케어’ 한국파견단장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자료=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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