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불러오는 선선한 바람이 무더위를 밀어내던 9월 마지막 날 인천 계양구 계양초등학교를 찾았다. 인천시의 시목(市木)인 목백합나무 중에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계양초 큰 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 편에 서 있는데, 바로 옆에 강당을 짓고 있어서 나무 주변이 펜스로 둘러싸여 있고, 큰 나무 앞에는 작업 테이블이 놓여 있다. 큰 기대를 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 그다지 좋은 풍경은 아니다. 그나마 지난해 세웠다던 큰 나무 표지판이 있어 나무의 의미를 알려 준다. 이번 계양초 큰 나무의 소개는 나무의 입장에서 그려 본다. <편집자 주>

# 계양초와 큰 나무

17-목백합-세로300.jpg
내 고향은 미국이란다. 요즘에야 다들 알겠지만 북아메리카란 곳이 내 고장이야.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에게는 낯선 곳이었지. 인천시는 1982년 한미수교조약 체결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나를 시목으로 정했단다. 한미수교조약 체결의 현장이 인천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주로 목백합, 백합으로 불리지만 꽃 모양이 커다란 튤립과 닮았다고 해서 튤립나무로도 알려졌어. ‘전원(田園)의 행복’, ‘멋진 애인’이라는 꽃말도 멋지지 않니?

세월이 흐른 탓인지 지금은 내 나이도 가물가물해. 누구는 100살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이상이라고도 하거든. 어찌됐든 너희들이 다니는 계양초등학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 시간이 꽤 흘렀구나. 아마 너희들의 학교가 1932년 처음 학생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여든 번이 넘도록 졸업식이 열렸구나. 다른 학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유독 계양초등학교는 집안이 대대로 졸업하는 경사가 많더라. 너희들과 너희의 부모,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모두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던 거란다. 학교에서도 3대가 졸업하는 경우에는 소개도 해 주고 기념사진도 찍어 주더군.

학교 길 건너 장기농약사 고규병(85)할아버지도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이 학교에 보냈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니? 고 할아버지는 원래 강화에서 살다가 한 50년 전쯤에 이곳으로 온 분이지. 지금이야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새 집들이 지어졌지만, 고 할아버지가 이곳에 자리잡았을 때만 해도 주변은 대부분 논밭이었단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곳들이 모두 야트막한 언덕이었던 게야.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었던 거지. 때문에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고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구나.

17-목백합2.jpg
특히 매년 열리는 동문회를 보면 졸업생들이 학교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학교 선생님들은 ‘대단한 동문회’라고 표현하더구나. 동문회 행사 이틀 전부터 만국기도 달고 운동장 정리도 하는 등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니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교실 입구로 들어오는 길에 놓인 해태상 알지? 17회 졸업생들이 1982년 가지고 온 것이란다. 참고로 1960년에는 계양초 상야분교도 생겼더구나. 지금은 다목적 강당도 만들고 있으니, 너희들이 뛰어놀기에 더 좋은 학교가 될 테지. 지금은 강당 공사로 내 주위에 펜스가 둘러져 있지만 공사가 끝나면 다시 너희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 황어장터 만세운동

내 제2의 고향인 계양1동은 많은 사연을 지닌 곳이란다. 학교에서도 알려 줬겠지만 황어장터는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인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대표적인 동네 중 하나란다. 또한 인근에서 가장 큰 소시장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지.

동네 옆으로 지금은 아라뱃길이 된 굴포천의 한 줄기가 보이지? 예전에는 물줄기를 따라 잉엇과의 민물고기인 황어가 많이 잡혔다더구나.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황어향(黃魚鄕)’으로도 불렸지. 그래서 장터 이름도 황어장터가 된 것이란다.

또한 이곳은 행정동으로는 계양1동으로 불리지만 더 많은 이들은 법정동 명칭인 장기동(場基洞)으로도 사용한단다. 장기동의 ‘장기’는 우리말의 장터를 뜻하는 한자어란다.

17-목백합3.jpg
다시 만세운동으로 돌아가 볼까? 황어장터는 5일장이었는데, 매월 음력 3일과 8일에 장이 섰단다. 1919년 3월 1일은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였어. 이곳 계양 주민들도 황어장터 장날이었던 3월 24일 6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단다.

역사학자들은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이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의 만세운동이었다고 하더구나.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분도 생겨났고, 주민 수십 명이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단다. 계양구청에서는 이를 기려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을 세웠더구나. 너희들도 동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 수많은 사연 지닌 소시장

17-고규병(85)-할아버지.jpg
▲ 계양초교 건너편에서 농약사를 운영하는 고규병 할아버지가 목백합나무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장기동 황어장터에는 조선시대부터 매우 큰 소시장이 꽤 오랫동안 열렸단다. 소를 비롯해 곡류나 잡화 등도 거래가 되긴 했는데, 소를 제외한 다른 물품들의 거래 규모는 크지 않았지. 장이 활발하게 열렸던 7월과 8월, 11월과 12월에는 평균 500~600마리의 소가 거래됐다고 하니 엄청났겠지?

요즘이야 큰 돈을 마련할 때는 집이나 땅을 팔겠지만, 예전에는 소를 팔아 목돈을 마련했던 시절이 있었단다. 때문에 큰 돈이 오가다 보니 술집도 생겨나고 도박을 하는 어른들도 있었단다.

너희들에게 들려주기에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역사의 한 장면이니 들어 볼래? 50년 전 서울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소개를 받아 장기동 음식점에 일자리를 찾아온 정동수(73)할아버지의 이야기란다.

"열일곱 살 때 여기에 왔어. 그때는 부평이라고 해서 왔는데, 와 보니 부평이 아니었던 거야. 부평에서 박촌을 넘어오는데 얼마나 깜깜하던지. 그때는 동네가 다 논밭에 초가집이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이 소위 말하는 ‘색싯집’이었어. 거기서 중화요리를 만들었지. 여기저기 한 열 군데 넘게 있었을 거야. 소 한 마리 팔아도 색싯집에서 3일만 있으면 한 푼도 가져가지 못했어. 불쌍한 사람들이지. 어떤 사람은 이곳에 놀러오기 위해 1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는데 3일도 못 버텼다고 하더라고. 노름판도 엄청 열렸고. 장터가 열리는 날에는 가설극장도 들어왔어. 사람들이 많이 오게 하려고 영화표 추첨도 했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걸려 있었지. 그때 백성약국인가 하던 박 형님이 있었는데, 송아지를 타려고 표를 수십 장 사서 사람들에게 뿌렸어. 가설극장에서도 박 형님이 표를 많이 산 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추첨할 때 형님의 번호가 담긴 표를 손에 쥐고 추첨함에 넣었다가 다시 빼내 형님을 당첨시켰지. 결국 송아지를 타게 된 거야. 재미났어. 그러다가 사람들이 차를 이용해 소를 대량으로 이동시키면서 결국 시장도 없어져 버렸지."

색싯집이 뭘 하는 곳인지 정 궁금하다면 어머니 말고 아버지에게 물어 보렴.

나와 이 동네의 길지 않은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모르겠구나. 부디 의미 있는 역사와 수많은 사연을 가진 이 동네를 너희가 어른이 돼서도 잊지 말고 간직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나중에 4대, 5대에 걸친 계양초등학교 동문이 생겨나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겠지. 가을바람에 감기 조심하려무나.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