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립지 물막이 공사 현장. <사진 = 인천경제구역 블로그>
동아건설산업㈜(이하 동아)의 김포 간척사업은 동아그룹 파멸의 서막이었다.

동아는 정부의 민간기업 참여에 따른 대규모 간척사업 방침으로 1980년 1월 14일 농경지 조성 목적으로 김포간척지(3천800㏊) 매립면허를 얻었다. 공장용지 조성 목적이었던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1천27㏊)이 매립면허가 취소(1972년 10월 31일)된 지 8년 만이다.

김포 간척지의 토대였던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 매립 용도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차례 바뀌었다. 최초 매립면허 당시인 1964년 9월 9일에는 수산양식(면적 1천275㏊)이 그 목적이었다. 그 뒤 경인특정지역 종합개발계획 발표로 1968년 2월 16일 매립 목적이 공장부지 조성으로 변경됐다. 매립 목적만큼이나 매립권도 바뀌었다. 수산양식이 목적일 때는 이명수(1991년 사망 당시 72세) 봉덕학원 전 이사장이었다. 공장용지(면적 1천27㏊) 조성으로 변경되면서 1971년 5월 11일 국영 기업체인 대한준설공사로 넘어갔다. 대한준설공사가 착공을 하지 않으면서 매립면허는 취소되고, 제방 등 매립시설물은 국유화 조치됐다.

동아는 농경지 조성 목적으로 3천800㏊에 이르는 김포 간척사업을 벌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 회사가 간척사업을 벌인 면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의 청라국제도시인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은 영세 노역자들이 1964년부터 매립권이 대한준설공사로 넘어가기 전인 1971년까지 자조근로사업으로 메운 것이었다. 당시 영세 노역자들은 율도~장금도~문첨도~청라도~일도~장도~경서동 고잔 간 길이 6천830m의 제방으로 7개 섬을 이어 놓은 상태였다.

▲ 제1방조제.
동아는 영세 노역자들이 쌓은 이 제방을 이용해 간척사업을 벌였다. 1985년 1월 15일 제방 등 국유 시설물 사용 대가로 1억7천500만 원을 정부에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동아는 영세 노역자들이 축조한 율도~장금도~문첨도~청라도 간 길이 1천980m의 제방 밖으로 율도에서 청라도를 직접 연결하는 제방(길이 1천900m)을 쌓았다. 그것도 영세 노역자들이 쌓았던 제방의 토석을 갖다가 썼다. 이렇게 제방을 막아 추가로 생긴 간척지가 400㏊이었다.

동아의 수법은 자조근로사업으로 매립한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을 매립사업에 손을 떼는 조건으로 땅 6만8천475㎡를 받기로 약정한 이명수 전 이사장과 다를 바 없었다. 동아가 순수 간척 제방을 축조한 곳은 장도~김포군 검단면 거여도~양촌면 오류리~가서도 2천536m에 불과했다. 이 제방을 쌓아 마련한 2천75㏊는 농경지 조성이 아닌 쓰레기매립지 목적으로 정부에 팔렸다. 지금의 수도권쓰레기매립지다. 환경청은 서울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경지 조성 목적으로 제방을 쌓은 김포 간척지를 대체 매립지의 적지로 꼽았다. 환경청은 동아와 1년간의 협상 끝에 1988년 2월 10일 수도권매립지 터를 양도했다. 당시 2천75㏊의 매입가격은 450억 원으로, 3.3㎡당 7천229원꼴이었다. 환경청은 간척지를 매입하면서 수도권매립지 조성 관련 용역사업과 건설공사의 수의계약을 동아 측에 약속했다.

나머지 김포 간척지 중 동아 소유의 밭(338㏊)과 논(791㏊), 영농부대시설(133㏊) 등 농지 1천262㏊는 그룹 전체의 운명을 결정 짓는 노른자위 땅으로 떠올랐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1987년 8월 20일 창립 42주년 기념사에서 김포 간척지를 ‘꿈이 영 그는 내일의 들녘’으로 평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 농장을 경작하면서 축적한 기술을 김포 간척지에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가로 200m, 세로 50m 장방형 구획의 기계영농, 화훼·원예농업, 유전공학을 접목한 양식업 등이었다.

"서해의 낙조를 배경으로 거대한 꽃밭과 황금 들판이 있고 온갖 고기가 뛰어노는 꿈의 동산…." 최 전 회장이 말한 ‘꿈의 동산’ 김포 간척지는 또 한 번의 용도변경 시도로 악몽의 종말로 치달았다.

#민간기업 간척 농지개발 이유는?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간척 농지 개발은 얼토당토 않은 사업이었다. 정부는 이 사업의 추진 명분으로 쌀 자급 실현과 실업자 구제, 경기 회복 등을 내세웠다.

정부는 2004년 달성 목표로 쌀 자급 실현 계획을 짰다. 이를 위해선 벼 재배 면적 110만㏊가 필요했다. 당시 벼 재배 면적은 이를 웃돌았지만 매년 3만㏊의 논이 택지와 공장용지 등 다른 용도로 전용됐다. 국내 경제 사정도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 동아그룹이 창립 42주년을 맞아 작성한 김포간척지 그림.
정부가 벼 품종 개발로 수확량을 늘릴 생각보다는 해안 매립을 통한 벼 재배 면적을 넓히기로 작정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중동의 경기 침체였다. 당시 중동에 진출했던 국내 대기업들의 건설용 장비가 가동을 멈추고 놀고 있었다. 현대건설의 해외 건설공사용 보유 장비는 3천245대에 달했다. 동아건설산업㈜도 1천110대에 이르렀다. 대규모 간척이야말로 해외에서 놀고 있는 장비를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사업이었다.

정부는 현대건설에 충남 서산 간척지 1만5천409㏊, 동아건설산업에 김포 간척지 3천800㏊ 매립면허를 내줬다. 정부는 나라 밖에서 놀리는 중장비를 간척 등 매립사업 목적으로 국내로 들여올 때 관세를 물리지 않는 특별 대책을 발표했다. 매립면허 조건은 대기업 퍼주기식이었다.

이 대기업들이 매립한 농지는 제방과 도로, 용수로 등을 빼고 모두 그들의 소유였다. 민간기업이 투자한 비용만큼 땅을 주는 지금의 공유수면 매립 관련법과 비교하면 당시 간척사업은 엄청난 특혜나 다름없었다. 동아건설산업이 율도~청라도~일도~장도~거첨도~안암도~가서도 등 7개 섬을 잇는 간척사업에 뛰어든 이유다. 동아건설산업은 간척공사로 쌓아 올린 제방의 길이를 9천366m로 발표했지만 사실은 영세 노역자들이 자조근로사업으로 1964년부터 7년 동안 축조했던 길이 6천830m를 포함하고 있었다.

# 동아건설산업㈜ 김포 간척지 추진 경위

▶ 1978년 8월 16일 : 민간기업 참여 간척사업 방침 확정
  - 동아건설산업 : 김포간척지, 현대건설 : 서산 간척지(1만5천409㏊)
▶ 1980년 1월 14일 : 공유수면매립면허(면적 3천800㏊)
▶ 1988년 2월 10일 : 수도권쓰레기매립지 양도(면적 2천75㏊)
▶ 1991년 1월 8일 : 준공 인가(매립면적 1천649㏊)
▶ 1993년 12월~1997년 4월 : 8차에 걸쳐 동아건설산업에 농업용수 공급 촉구
▶ 1997년 7월 19일 : 동아건설산업이 자사 부담으로 용수 공급하기로 통보
▶ 1997년 12월 15일 : 용수로 공사 사업시행 인가(농림부)
▶ 1997년 12월 30일 : 용수로 공사 착공 통보(동아건설산업)
▶ 1998년 2월 25일 : 마이클 잭슨 김포매립지 방문
▶ 1999년 5월 31일 : 정부 김포 간척지(1천223㏊) 매입계약 체결(6천355억 원)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