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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우 고려대 연구교수
예측했던 일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10년의 유명세만으론 한국정치의 격랑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다. 그가 국제사회서 쌓아온 여러 가지 좋은 경험들이 격랑이 일고 있는 한반도의 위기극복을 위해서 잘 쓰여지는 외교안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대다수 국민들의 바람도 물거품이 된 것이다. 신기루 같았던 그의 존재감이 정치권의 현실과 거센 바람 앞에서 다 없어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한국정치는 정치권 밖에서 보는 모습과 안에서 직접 정치를 하면서 느끼는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진흙탕 같은 한국정치문화 속에서 야당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으면서 심신이 지친 모습으로 연일 강행군을 하다가 명절전후 심사숙고 후 나온 결론이라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그는 준비된 대통령도 아니고 단지 애국심을 가진 노쇠한 경륜의 국제외무관료였다는 이미지만 더 커진 것이다.

UN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현실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자리라는 이미지만 더 남긴 것이다. 그 스스로 설 명절 연휴 동안 일정을 수행하고 숙고하면서 더 이상 정치권에 발을 잘못 담그고 있다 보면, 그동안 소중하게 쌓인 UN 사무총장의 명예마저 다 잃을 것이란 강박관념이 컸을 것이다. 아마추어 정치인의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 한국정치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적 자원과 조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반대 정치세력들의 비판과 견제 앞에서 스스로 내면세계서 갈등을 겪다가 갑자기 퇴로를 연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정글(jungle)과 같은 곳으로 이런 저런 구설수를 다 극복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확고한 정체성이 있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토양이다. 반 전 총장은 국가에 봉사한다는 애국심과 외무관료로서의 명성은 있었지만, 자신의 가족을 희생양 삼아서 물적자원까지 써야 하는 정치판의 현실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정치교체라는 화두는 상징적인 언어였지 그 내용과 실체가 반 총장의 몸속에 뿌리 내린 용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저 스스로 지난 수년간 정치평론을 하면서 다룬 가장 빈번한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반 전총장이 과연 귀국 후 현실정치에 잘 적응하고 대통령으로 등극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야권은 견제 차원서 칭찬과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비판과 냉소적인 메시지를 계속 보냈으며 탄핵정국 이후 보수층의 분열과 자기성찰 부족으로 국민들의 실망감을 키워온 여권은 대어급의 후보 공급에 의존하며 반 총장의 경륜과 인물됨을 칭찬하면서 후보카드로 키워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1월에 귀국 이후 20%대의 고공행진을 하던 지지율이 최근 귀국 후 그가 보인 모습에 실망한 지지층과 본인 스스로 설정한 정체성의 불명확함으로 인해 지지율이 10%대 초반으로 추락하면서 조기퇴진이라는 강경카드를 쓴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보인 그의 심정은 그 스스로 생각하는 한국정치의 모습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고 앞으로 그가 가야할 길이 녹녹지 않다는 자평으로 많은 고민 속에서 접은 것이다.

그동안 귀국 이후 많은 정치인들과 대한민국의 명망가, 그리고 국민들을 만나면서 그가 하려는 정치의 모습이 쉽게 구현될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그동안 쌓아온 명성마저 정치권이라는 진흙탕으로 추락해 되찾기 어려운 상황을 걱정하면서 오늘의 결단이 가능했다 할 것이다. 특히, 실체가 불분명한 ‘충청대망론’도 한국정치의 분열과 갈등 구조 속에서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야당의 정치인들이 전해준 불출마 제의가 더 크게 다가오는 심리적인 변화가 느껴진다. 문재인 씨의 독주를 방지하는 반기문 카드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부터는 어떻게 보수권이 단합된 모습으로 강력하고 선명한 보수후보를 만들어내느냐는 큰 숙제가 남아 있다. 격랑이 몰아치는 한반도 주변의 불확실한 안보변수, 가중되는 경제난, 실업난을 타개하고 관리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정치권은 합리적인 중도보수의 이념을 구현하는 후보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부터는 그러한 후보를 만드는 일에 보수권의 대동단결과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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