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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이사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심창구 교수의 ‘약창 춘추’중에 기억에 남는 ‘아버지’란 글이 있다. 이 글은 서울대 박동규 명예교수의 어릴 적 추억을 듣고 정리한 것이다.

 박동규 교수가 초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면서 오늘 쪽지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맞았다고 자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길가에 있는 빵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빵을 사주셨다. 며칠 후 아들은 하굣길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그날 따라 아들의 표정은 밝지 못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아버지의 손조차 잡지 못하는 아들에겐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지난번 아버지와 들렀던 빵집 앞에 이르자 아들은 흘깃 빵집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아버지는 왜 오늘은 손도 잡지 않고 빵을 사달라는 말도 안 하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들은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다가 오늘 쪽지 시험에서 100점을 맞지 못했다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애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언제 100점을 맞아야 너를 예뻐하고 빵을 사준다고 했더냐? 네가 100점을 맞지 못해도 넌 내 아들이란다"며 등을 토닥거렸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들을 빵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빵을 사주셨다.

 아들이 장성해 서울대 강사가 된 어느 날, 온종일 강의를 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 탔다. 그날 따라 속은 더 허기져 기운이 떨어졌다. 만원 승객들로 혼잡한 버스에서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버지였다. 서울시내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은 우연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피로와 허기가 가득한 아들의 표정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집까지는 아직 다섯 정거장이 남았는데도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자고 하셨다.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아버지는 정거장 근처의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잔치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주머니엔 잔치국수 두 그릇 살 돈밖에 없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요기를 때우고 다음엔 더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겠다며 미안해 하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그릇을 앞에 놓고 다 큰 아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 이야기는 80세가 넘은 박동규 교수가 어떤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버지 박목월 시인을 회고한 내용이다. 따듯한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훌륭한 학자로 성공한 아들의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해서, 부부 간의 소통과 다툼 후의 화해 기교에 서투르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터득했다. 내가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어렵게 학업을 마쳤기에 자식들에게만은 등록금 걱정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근검절약하며 살아왔다. 엄동설한엔 자식들이 신고 나갈 운동화를 연탄불에 따듯하게 데워 줬고, 성적 상승을 위해 치맛바람이 아닌 바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초등학교를 들락거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약국 안 책상에 함께 앉아 예습과 복습을 시키고 시험 때는 자식들과 하얗게 밤을 새우며 예상 문제를 내주기도 했다. 매일 매일의 숙제는 일기를 꼭 쓰게 하는 것이었다.

 막내딸이 태어나자 그 바통은 아내에게 돌아갔고 엄마의 정보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덕분에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금년 5월, 막내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진학을 한단다. 고등학교와 대학 생활을 기숙사에서 지내느라 떨어져 살았는데 이제는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이역만리에서 또 그리움을 나눠야 하는 허허로운 아버지의 심정을 막내딸은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있는지. 세상의 자녀들아!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애틋한 심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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