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차분하게 바로잡고 싶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이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6일자 조간에 게재한 사설 제목이다. 이 제목을 본 한국인이라면 아마 일본이라는 나라가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할 때도 있나 싶었을 것이다. 또 한편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 요미우리가 정말 제목처럼 진심으로…? 하는 식의 의구심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곧 일본이라는 나라인데 그런 일본이 어떤 식으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인가. 그러나 이 사설에 대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이내 깨닫게 된다.


눈여겨볼 러·일의 역사 재조명

 
`일본인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이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건 중요한 결단이었으며(중략),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북·동유럽은 물론 이집트로부터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및 아프리카 민족 운동에 커다란 희망을 안겨 줘 그 물결은 구미 열강의 식민지 지배 타파로 이어졌다'는 이 어이없는 내용이 바로 요미우리의 사설이면서 일본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의 다른 당사자 러시아도 역시 쓴웃음을 짓게 한다. 러시아는 또 그들대로 자기 식의 아전인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사주간지는 `바략호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용맹성이 두드러진다'고 했고, 푸틴 대통령은 1904년 2월9일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과 맞서 싸우다 자폭한 바략호와 코레예츠호, 두 군함의 `영웅 정신'만을 자못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올 3월 선거를 앞둔 푸틴 행정부가 내세운 선거 전략의 하나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우리까지 그 전략에 말려 들어간 듯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러시아가 지난해 러·일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인천 땅에 당시 전사한 장병들에 대한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나섰고 결국 우리 정부와 인천시는 승락했다. 게다가 연안부두 친수공간(러시아 측 당초요구 부지는 월미공원이었다)에 땅 5평까지 무상으로 제공했고 그 결과 엊그제 추모비 제막식을 가진 것이다. 러시아 당국자의 최소한의 사죄 표명도 없는 추모비 건립은 `치욕적인 역사의 산물'이기에 온몸을 던져 거부한 인천지역 시민·문화단체의 반발은 역사적, 시대적 정당성이 있다.
 
굳이 역사를 들추지 않아도 러·일전쟁은 20세기 초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하려는 양 세력간의 다툼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제국주의로의 팽창, 러시아의 몰락, 마지막으로 우리의 치욕적인 망국(亡國)으로 이어진다. 물론 러시아가 승리했다 한들 우리의 운명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던 당시의 정황이다.
 
그런데 이 곳에 그런 가해자의 하나였던 러시아의 추모비를 세운다? 그리고 그 수모를 말 한마디 못하고 고스란히 당해야 했던 피해자가 예스하고 승낙했다? 러시아가 인천 앞바다에서 추모 행사를 가지는 것은 오늘날 양국 관계로 보아 양보할 수 있다 해도 내 땅에 추모비는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제 아픈 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요, 나라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뿐이다.
 
러·일전쟁 100주년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학술회의와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피해국 한국에서는 겨우 학술회의 한 차례가 전부이다. 그 현장이었던 인천 땅에는 지난 10일 입항한 러시아 전함 바략호, 코레예츠호 수병들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리고 추모비 제막을 반대한 시민단체 회원들은 우리 경찰에 의해 무더기로 연행됐다니 기막힐 노릇이다.


역사의식 팽개친 사회 돼서야

 
인천에 있는 대학들에게 말한다. 제 나라 제 고장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알리지 못한 까닭에 추모비가 관광 자원이라고 좋아하는 얼빠진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당국자들에게도 묻는다. 인천에 세워진 그 추모비가 역사를 사실 그대로 담고 있는지, 최소한 문안이라도 한번 검토한 후 승낙했는가?
 
이런 지경에서 누구를, 역사 왜곡과 호도에 대해 탓할 수 있으랴. 정말 “역사를 차분하게 바로잡고 싶다.”

김윤식/시인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