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前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최근 도시 재생 사업이 진행되면서 송학동 관사를 신축하기 전 거주했던 신흥동 소재 옛 시장 관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는 신흥동 1가 19번지에 위치한 이 일본식 건물을 인천 ‘부윤’ 관사라 불렀다. 광복 후, 인천시장 관사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소략해 1973년 「인천시사」에 언급된 내용 외에 당시 신문, 지도 및 사진 등에서 어렵게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을 정리해 보면, 인천시장 관사는 현재까지 모두 4차례의 이동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일본 부윤이 사용하던 관사다. 인천 부윤 관사는 인천부청사 내 동쪽에 있다가 청사 증축을 위해 송학동 소재 부유지(府有地)로 신축 이전했다. 

이 관사는 송학동 고개 위에 위치한 2층집으로 1938년 영정(永井)부윤이 3만8천500원을 들여 신축했다. 그리고 광복 후, 1946년 제1대 임홍재 시장 재임 당시에 사용하다 화재로 소실됐다. 두 번째는 화재 후, 신축하거나 일정한 관사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던 8년간의 시기다. 이에 대한 단서는 제2대 및 제5대 표양문 시장 재임 시 주소가 하나는 전동 14의 2번지, 다른 하나는 관교동 2가 3번지로 나와 있어 처음에 전동에 있던 관사에서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관교동으로 옮겨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1946년 시장 관사가 소실된 이래,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건축물을 임대해서 전동 혹은 관교동 등 임시적인 성격의 관사를 활용했고 새로운 관사를 신축하거나 일정한 관사를 안정적으로 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가 신흥동 인천 ‘부윤’ 관사 시기다. 제6대와 제7대를 역임한 김정렬 시장 재임 당시(1954.11.30) 현주소가 신흥동 1가 19번지로 명시되고 있어 그때 관사로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김정렬 시장은 앞서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내동에 소재한 법원장 사택에서 시장 관사인 신흥동으로 곧장 옮겼던 것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신흥동 관사는 제6대 김정렬 시장 때부터 1967년 제14대 김해두 시장이 송학동 관사로 입주하기 전까지 12년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송학동 관사를 신축하고 본격적인 인천 발전 시대를 열었던 시기이다. 자유공원 중턱에 한옥으로 지은 네 번째 관사는 1965년 제12대 윤갑로 시장 때 기획하고 신축해서 제13대 신충선 시장(1달 반 만에 순직)을 이어 1967년 제14대 김해두 시장이 입주한 이래, 2001년 10월 역사자료관으로 전환하기까지 34년간 시장 관사로 활용됐던 공간이다. 

55년 전 비로소 우리 손으로 지은 시장 관사를 신축했던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1960년대는 국가 재건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고, 인천은 항구 도시 특성상 각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던 시기이다. 자연히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정주의식이 필요했다. 그것이 인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는데, 1965년 윤갑로 시장 당시 제1회 인천시민의 날이 제정되고 인천시민의 노래, 시민 헌장, 시민행진곡, 시 휘장이 만들어지고 시사편찬위원회가 구성됐던 것은 그런 연유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시장 관사도 새롭게 조성돼 서양식 건물 대신, 전통을 살릴 수 있는 한옥으로 신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동안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현재 인천 ‘부윤’ 관사라 지칭되는 신흥동의 관사는 1954년 당시가 행정적으로 인천시 시기였으므로 ‘부윤’ 관사가 아닌 옛 인천 ‘시장’ 관사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민선 시장 시대가 되면서 관사는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간직된 송학동과 신흥동 소재 시장 관사 건물이 향후 어떻게 활용될지 궁금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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