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공론 벗어난 현실 정치로 백성 눈물 닦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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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공론 벗어난 현실 정치로 백성 눈물 닦아주다
7. 조선시대 세제 개혁 ‘대동법’ 시행 이끈 김육
  • 조한재 기자
  • 승인 2020.05.26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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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와부읍 삼패사거리 일대는 조선시대 평구(平邱)라 일컬었다. 지금도 교통의 요지이지만, 당시엔 서울에서 강원도 평해로 가는 대로에서 가장 큰 역인 평구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평구는 조선시대 최고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 등 나라의 미래를 구상했던 지역으로, 이를 주도했던 김육 등 청풍김씨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김육(金堉, 1580~1658)은 자(字)가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손자이며, 성혼(成渾)·이이(李珥)에게 수학한 김흥우(金興宇)의 아들이다. 

김육은 남인 학자인 조호익(曺好益, 1545~1609)에게 상수학을 배웠고,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했다. 당시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여기에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확전된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국제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삼국의 역사를 바꿔 놨다.

만주지역에선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결국 청나라를 건국하더니 종국에는 중국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 에도 시대가 시작됐다.

1 전라북도 익산시에 세워진 김육 영세불망비. 2 잠곡 김육의 친필 유고집. 실학박물관 소장. 3 대동법의 시행 세칙이 담겨있는 ‘호서대동사목’.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4 김육의 대동법 시행에 대한 공로를 칭송한 비석이 경기도 평택시에 있다. ‘대동법시혜비탁본’.
1 전라북도 익산시에 세워진 김육 영세불망비. 2 잠곡 김육의 친필 유고집. 실학박물관 소장. 3 대동법의 시행 세칙이 담겨있는 ‘호서대동사목’.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4 김육의 대동법 시행에 대한 공로를 칭송한 비석이 경기도 평택시에 있다. ‘대동법시혜비탁본’.

#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실천하다

김육은 13세 때에는 왜란으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피난을 다녀야 했고, 어린 나이에 부친과 숙부, 모친의 상을 연이어 당했다. 

어려운 삶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공부에 매진했다. 1604년 성균관시에 수석을 차지하고, 증광별시(增廣別試)에 합격하고도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해 조정에 나갈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왔다. 

"나무꾼과 농부들이 어울려 오랜 세월 깊이 사귀었다.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추수하고 봄에 비가 내리면 밭 간다. 손님이 오면 웃으며 물고기·과일·고사리 등을 안주로 내놓고, 맑게 담소하며 속마음을 터놓았다."(김육, 「잠곡필담」 참고)

김육은 주경야독을 철저히 실천했다.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가난해서 밥 지을 쌀이 없을 정도였기에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워 서울까지 지고 가서 팔았고, 직접 땅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가난을 부끄러워 하거나 구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조 임금의 부마였던 신익성이 찾아왔을 때, 밭갈이하는 사람은 의관을 갖출 수 없고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게 된다며 쟁기질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는 설화는 김육의 면모를 잘 보여 준다.

김육은 시골에서 농민들의 처참한 현실, 농사 짓는 방식, 생활문화까지 관찰하며 이를 직접 경험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 안민(安民)의 정치를 펼치다

김육은 시대정신을 구현한 정치가였고 모범적인 행정관료였다. 

당시 임진왜란을 겪고 국가 경제는 황폐한 지경에 이르러 백성들은 불안정한 생활, 과중한 부세,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고통에 허덕였다. 국가적 어려움 속에서 관직에 임하는 그의 신념은 어느 누구보다도 굳세고 확고했다. 

김육은 경제(經濟)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스스로 재상(宰相)이 되자 국가 경제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했으며, 특히 수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했다. 당시 일반 관료들이 주자학의 의리나 명문에 목숨을 거는 것과는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위기 국면에서 경전에서 말하는 모범 답안지를 모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고기 잡고 나무하는 것이 생명을 구할 수 있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국민이 처한 실상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체험한 것을 토대로 현실을 대처해야 함이 옳았다.

김육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이 백성의 안정에 있으며, 국가를 운영하면서 북방을 강화하고 세금을 거둬 국가 재정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은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우선시 해야 하는 것이 백성의 생활 안정이라고 여겼다. 이를 위한 대동법은 당시 국가 재정이 파탄 난다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조선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국가적 보복을 위해 국방력 증대와 북벌을 우선시하는 인물들의 반대도 심했다.

하지만 김육은 ‘안민(安民,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다)’에 초점을 뒀고, 대동법을 관철시켰다. 그 스스로 ‘편민(便民, 백성들을 편리하다)’을 위한 제도라고 대동법을 평가했다. 대동법이 후대에 시대를 구하는 제도 개혁으로 평가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화가 맹영광이 흠모해 그림을 그려줬다. ‘송하한유도’. 실학박물관 소장.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화가 맹영광이 흠모해 그림을 그려줬다. ‘송하한유도’. 실학박물관 소장.

# 자강불식(自强不息)의 교훈을 새기다

김육은 4회에 걸쳐 명나라와 청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왔다. 

1636년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해 6월 15일 출발해 이듬해인 1637년 6월 2일에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첫 중국 여행에 김육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실컷 대화하고, 예악을 묻고, 문학을 논평하고, 의문도 풀고, 못 듣던 말도 들으리라’ 기대했다. 중국의 대국적 면모와 문화의 번성함을 확인하고 견문을 넓힐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김육은 외교의 장에 임하면서 중국 문화, 특히 당시의 정세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사신으로서 중국 문명에 대한 애착, 민속과 신앙, 장묘제도, 조운선과 운하와 수로의 압문 이용 등에 주목했다. 

그가 사신으로 지나던 길은 명나라와 청나라가 각축을 벌이는 곳으로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매번 뇌물을 주고 각 지역을 통과해야 할 정도였다. 하물며 조선 사신으로 중국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에 들어갈 때도 문지기에게 뇌물을 바쳐야만 했다.

김육은 명나라의 높은 관료를 만난 자리에서 "밖으로 외적이 침입하고 안으로 도적이 들끓으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고통받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돈만 좋아하는군요!"라며 이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관료들도 이에 공감했다. 결국 명나라는 멸망했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됐다.

김육은 이를 바탕으로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고 노력한다)에 뜻을 세웠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청나라에게서도 배울 점은 배웠는데, 시헌력을 도입한 것이 일례다.

그는 세제 개혁과 함께 조선의 미래를 위해 화폐를 주자해 유통하고, 교통 발전과 물류의 효과적인 이동을 위해 수레의 제조·보급에 노력하기도 했다. 또 활자를 만들고 「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효충전경(孝忠全經)」, 「구황촬요(救荒撮要)」,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발간해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고 출판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김육의 치열했던 삶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국민에 초점을 맞춰 정책을 도입하고, 올곧게 대내외적으로 강한 나라를 주창했던 그의 시대정신이 바라본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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