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조선의 정계는 200년간 지속된 훈구 외척의 정치를 대신해 사림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림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200년 역사의 훈구 외척세력의 기반까지 완전히 물러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고, 훈구 외척의 후손이라 해도 사림적 시대분위기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은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랫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통일 이후 각 제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대륙침략을 꿈꾸고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 전쟁을 도발했는데 임진왜란과 관련해 웬지 씁쓸한 얘기가 여과없이 전해지고 있다.


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는 시대적 상황

 
일본의 조선침략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조선의 조정은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 국제간의 답례에다 그들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 일행을 파견했다. 정사(正使)에는 서인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에 동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을 허성(許筬)으로 일본으로 보냈는데 뜻밖에도 귀국 후 사신들의 보고는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반면,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했다. 이에 조신들간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당시 동인의 우세와 조정 대신들의 안일을 바라는 요행심으로 대세가 김성일의 의견 쪽으로 기울어졌고, 이러한 결정은 통신사 귀국시의 정국의 주도권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김성일은 치욕적인 오명을 남긴 `역사의 죄인'처럼 됐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질책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실정이다.
 
역사속에 `만약'이라는 용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만약에 귀국후 두 사신의 보고가 일치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시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그래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보고내용만이 달랐을 뿐 국가안보에 대한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고 또한 국가운명에 관련된 문제가 한 두 사람의 견해에 따라 좌지우지 될 그럴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두 정파의 정책이 `부국강병'을 우선으로 하느냐(서인), 아니면 `민생안정'을 우선으로 하느냐(동인)에 따른 차이였을 뿐이라는 게 현재의 시각이다.
 
고대로부터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왕조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를 실현시킨 현명한 군주는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역사속에 `성군'이라 불리는 군주가 몇이나 되던가. 부국강병은 농민의 세금과 부역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그러한 결과는 오히려 부유한 양반 신분층의 기득권 유지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부국강병의 실현은 민생의 파탄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조선의 여러 제도는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병역의 문제만 하더라도 특정신분의 병역기피는 만연화됐고,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같은 의적(?)이 횡행해도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율곡이 1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 시점이었으나 그마저도 민생문제와 관련해 결국은 하나의 건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파싸움의 대표적 사례인가

 
전쟁의 확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더군다나 국가는 이미 총체적 위기로 치닫던 상황에서, `전쟁예고'라는 방법을 통해 흐트러진 민생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어 그들의 땀과 눈물을 강요했었어야 했던 것인지, 민생안정을 우선으로 해 전쟁대비를 했었어야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단언할 수 없을 것 같다. 단지, 그 모두가 그 시대를 살아갔던 정치인들의 고뇌의 결과라는 것일 뿐….
 
아무튼 이 사건은 식민사관에 의해 더욱 더 철저히 이용당해 동인과 서인의 정책적 내용은 덮어둔 채 당파싸움의 대표적 사례로 선전됐다. 결국 조선의 정치를 정책이 없는 감정의 정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사왜곡이 우리 역사 구석구석에 얼마나 교묘하게 자리잡았는가를 무섭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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