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삶은 수없이 많은 ‘만남’으로 영글어갑니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 만남이 여전히 기쁨과 유익함을 주고 있다면 ‘인연’이라 하고, 그렇지 않고 상처로 얼룩져 있다면 ‘악연’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똑같은 사람을 두고도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인연’으로 남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연’이 돼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인연과 악연을 구분하는 기준은 ‘유익함’입니다. 유익하다는 것은 곧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를 만나면서부터 내가 성장했고, 나를 통해 그가 성장했다면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만난 그 사람이 훗날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두가 처음에는 인연이라고 믿고 사귀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만남을 ‘운’이나 ‘팔자’ 탓으로 돌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악연이 아니라 인연으로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긍정력 사전」(최규상, 황희진)이라는 책에 언니의 우유를 몰래 먹고 시치미를 떼는 여동생과 대화하는 글이 나옵니다.

"네가 내 우유 먹었지?"라고 거칠게 묻자, 동생은 "아냐. 안 먹었어"라며 화를 냅니다. 그러자 언니가 작전을 바꿔서 부드러운 말투로 "우유, 맛있었지?"라고 묻자, 동생은 미소를 지으며 "응"이라고 답합니다. 

언니의 두 번째 질문이 없었다면 자매의 관계는 악연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니의 거친 말투가 부드럽게 바뀌고, 동생의 입장이 돼 물었을 때 관계가 복원됐습니다.

유머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자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후배 강사가 선배에게 강의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선배는 "강의가 끝나면 청중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게. 그게 예의니까"라고 하자, 후배는 그러겠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선배는 "그리고 물러날 때는 발끝으로 살살 걸어 나와야 하네"라고 당부하자,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후배가 그 이유를 물으니, 선배는 이런 답을 들려줍니다. "청중이 깨니까. 그게 예의야."

물론 웃자고 하는 유머이니까 그냥 웃어 넘겨도 되지만, 행복의 지혜를 이 유머에서 굳이 찾고자 한다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준을 ‘너’에게 두어 헤아려야 한다는 점일 겁니다. 관점을 강사인 ‘나’에게 두면 졸고 있는 청중들의 낮은 수준을 탓하겠지만, 관점을 ‘청중’에게 두면 자신의 강의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될 겁니다. 이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어떤 태도가 강사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당연히 후자의 태도입니다. 

두 개의 유머 사례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녀야 할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똑같은 사람을 두고 악연이 아닌 인연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수확입니다. 바로 ‘너’에게 기준을 두고 ‘부드러운’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20대에 만나 40여 년 동안 ‘인연’이 되어 주신 서태양 교수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정년퇴직 후 6년 동안 써오신 시를 묶어 얼마 전에 시집을 내셨습니다. ‘좋아서 미운 사람, 미워서 좋은 사람’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보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만남을 악연이 아닌 인연으로 만들려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를 이 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인연으로 만나/질펀하게/사랑하며 미워하며/쌓아 올린 세월의 더께//벽을 문이라 한들/문을 벽이라 한들/용서 못 할 잘못이 무엇이랴!//편안하게/마실 와서 걸터앉을 평상처럼/단단한 바위처럼/늘 그 자리에 있어만 주오//좋아서 미운 사람/미워서 좋은 사람’ 

시인의 가르침대로 미움도 사랑의 얼굴이었습니다. 좋아서 미운 것이고, 미워서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생각에서부터 잠자고 있던 행복이 기지개를 켤 것이고, 이때 너에게 기준을 두고 부드러운 태도로 인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거웠던 제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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