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평생을 힘겹게 살아오신 어느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커다란 강을 만났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강을 건너기 전에 이 샘물을 마셔요. 그러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잊을 겁니다. 그러나 고통뿐만이 아니라 행복했던 모든 기억도 함께 잊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전설인 이 이야기의 할머니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마시지 않으면 고통 때문에 괴로울 것이고, 마신다면 기쁘고 즐거운 기억까지도 사라질 텐데 말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 걱정도 없이 사는 사람도 속을 들여다보면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아서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삶은 이렇게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영글어갑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환호 뒤에는 어김없이 실패의 아픔과 고된 훈련의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움과 고통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 비난받을 때의 고통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데, 비난을 받으면 그 인정욕구에 상처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난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난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비난을 어떻게 해석할까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비난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으로 독일 심리학자 베르벨 바르데츠키는 ‘인정하고 말하기’를 제시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가까운 사람에게서 비난을 들으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비난의 말이 아프다면, 그 말이 옳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즉 그것을 인정할 수만 있다면 그때 바르데츠키의 조언처럼 비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뀔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려고 노력할 테고, 그렇게 수정돼 갈수록 우리는 성장합니다.

이재무 시인의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라는 짧은 시에서도 같은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즐거웠던 기억들은 그리움을 낳지만,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때 고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 찾게 되고, 이것이 나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눈보라 몰아치는 들판에서 살아가는 야생화가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란 화초보다 생명력이 강한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고통은 다가올 축복을 담고 있는 씨앗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라고 했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주저앉아 절망할 게 아니라 오히려 ‘지혜를 경청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삶은 간단치 않습니다. 슬픔 때문에 무기력한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의 화살을 맞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슬플 때는 그냥 하염없이 울면 됩니다. 비난의 화살을 온몸에 맞고 비틀거리면서 불같이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에 너무 오래 취해 삶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망가뜨리게 하면 안 됩니다.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다시 비상하는 솔개처럼 삶의 야생성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고통 속에서 지혜를 찾아야만 잊고 있던 야생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처한 고통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보이지 않던 출구를 어렴풋이나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망각의 샘물을 마시라는 천사의 제안에 할머니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요? 힘겨웠던 고통을 모두 잊을 수 있는 샘물이지만 동시에 기쁨과 행복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샘물입니다. 전설 속 할머니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통까지도 껴안는 삶의 태도가 잠자고 있던 기쁨이 고개를 들게 하는 묘약임을 전설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