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우리 사회에 여전히 폭력이 횡행하고 있다.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직장폭력, 군내폭력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유형의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최근엔 여자 프로배구 이재영·이다영 선수의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학폭) 사실이 드러난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폭로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다. 얼마 전 미투운동이 확산됐던 것처럼 들불같이 번지고 있다. 우리 국민은 예로부터 정(情)이 많은 따뜻한 정서를 지닌 국민이었다. 그런데, 뼈에 사무친 고통을 안겨준 일제강점기와 전쟁, 명령·지시 위주의 통제적 군사문화, 급속한 경제성장과 과도한 경쟁을 거치는 등 혹독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폭력성이 가시처럼 돋아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 1월 8일 국회는 민법을 개정해 제915조의 징계권 규정을 삭제했다. 종전의 민법 제915조는 친권자가 아동의 보호나 교양을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해 부모의 체벌을 ‘사랑의 매’로 미화시켜 합법화하는 규정으로 오인돼 왔었는데, 이 규정을 삭제한 것을 계기로 향후 자녀에 대한 체벌과 아동 학대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국회는 지난 26일 ‘양천서 아동학대 사망사건’(정인이 사건)으로 관심을 모은 ‘정인이법’을 개정했다. 아동학대살해죄를 신설해 아동학대·살인 행위에 대한 형량을 강화한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 개정안을 처리한 것이다. 앞으로는 아동을 학대하고 살해한 경우 ‘아동학대살해죄’로 규정돼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된다. 

이는 현행 ‘아동학대치사죄’나 ‘살인죄’보다 형량이 강화된 것이다. 이러한 입법조치들에 대해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이라도 국회가 폭력 방지를 위해 적극 나선 것은 환영할 일이다. 작년 10월 국정감사 시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순천·광양·곡성·구례갑)이 군사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군대 내 폭행·가혹행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 6월까지 총 4천275건이 발생했다. 이는 2011년부터 2015년 6월까지 발생 건수 3천643건에 비해 600여 건이 증가했다. 폭행·가혹행위로 처벌받은 결과를 보면 불기소 1천238건(28.9%), 선고유예 51건, 집행유예 127건에 실형은 단 4건(0.09%)에 불과해 이전 5년간 발생한 사건 중 실형 51건(1.4%)보다 더 떨어졌다. 재판 결과가 이처럼 솜방망이 처벌로 나오니까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법조계가 폭력 폐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엄중 처벌해야 한다.

폭력행위는 대개 은밀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기 어렵다. 피해자가 이를 공개하면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는 거리낌 없이 반복적·가학적으로 폭력을 일삼게 된다. 모든 불법행위는 은폐되면 안 되며,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엄중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범죄 발생을 방지하는 ‘일반 예방’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지난 25일 헌법재판소는 사실을 공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 제1항)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재판관 5(합헌) 대 4(일부 위헌)로 내린 결정이다. 매우 실망스럽다. 사실(fact)을 말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법의 망토로’ 진실을 감추고 거짓과 범죄를 비호하자는 것인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법전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 한 폭력피해자 등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심리적 위축을 당하게 되고 가해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몸서리를 치게 될 것이다. 가해자의 알량한 명예가 피해자의 절절한 인권보다 더 소중하단 말인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를 법이 비호하는 한 사회 발전은 불가능하다. 진실이 합법적으로 감춰지면 세상은 어둠이 지배한다. 진실을 옹호해야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도 발전하고 언론도 활성화되고 정의도 실현된다. 진실 옹호야말로 역사 발전의 구동력(驅動力)이다. 따라서 헌재의 이번 판단은 가치의 비교형량에 실패했고 너무 안이하다. 좀 더 전향적으로 판단했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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