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성 인하대 사학과 교수
임학성 인하대 사학과 교수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을 가진 ‘춘래불사춘’은 당(唐)나라 때 시인 동방규(東方규)가 한(漢)나라 때의 고사(古史)를 바탕으로 하여 쓴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의 제목을 풀면 ‘소군(昭君)의 원망’ 정도가 되겠는데, 일단 시의 내용을 음미해 보자.

 『한나라의 국운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조정에는 무신(武臣)도 넉넉했다네.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중략>…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는 것은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네.』

 여기에 등장하는 ‘박명한 여인’이 바로 왕소군(王昭君)이다. 그녀는 기원전 1세기 때 인물로 서시(西施, 기원전 5세기), 우희(우미인, 기원전 3세기), 양귀비(楊貴妃, 719~756년) 등과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인으로 칭송되고 있다.

 예부터 미인은 박명이라 했듯이 그녀 또한 절세의 미모 때문에 기구한 운명에 처해졌는데, 그 운명은 나라를 위한 희생이었다.

 왕소군은 원래 한나라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8~33)의 궁녀였다. 원제는 환관들의 득세를 막지 못해 나라의 부패와 몰락을 가속시켰고, 결국 외척 집안의 인물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겨 전한(前漢)시대의 마침표를 찍은 황제였다.

 더군다나 나라의 외교 상황도 좋지 않았다. 국초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후 한나라는 오랫동안 비단과 쌀을 공물로 바치고 황실의 공주를 흉노 군주의 처로 보냈던 것이다.

 원제는 공주 대신 궁녀를 공주로 속여서 보내기로 했고, 초상화에 그려진 가장 보기 흉한 궁녀를 선택했다. 그런데 왕소군이 가장 흉한 궁녀로 뽑혔던 것이다.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억울한 사연으로 고향을 떠난 왕소군의 원망을 대변한 것이 바로 동방규의 시였다. 시에서 오랑캐 땅이라고 지칭한 곳이 바로 흉노의 땅이며, 허리띠가 느슨해질 만큼 야위어 갔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고 그녀를 위로했던 것이다.

 이처럼 ‘춘래불사춘’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에서 생성된 슬픈 고사성어라 하겠다.

 우리는 봄 하면 ‘새로움’, ‘푸르름’, ‘희망’, ‘생기’, ‘시작’, ‘꽃’ 등등의 단어를 연상하곤 한다.

 사계절이 뚜렷한(사실 기후환경 변화로 ‘뚜렷한’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우리나라는 추위로 웅크려 있던 겨울만 버티면 따스함을 가져다 주는 봄이 온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봄은 새 생명이 탄생, 시작하는 계절로 다가왔다. 그런 때문인지 인천을 대표하는 원로 문화인 가운데 한 분인 김윤식 시인은 ‘봄’이라는 시에서 ‘또 봄이 왔으니 바람나야지/ 어깨에 멘 가방이 가볍다’라고 희망과 생기를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봄이 가져다 줄 희망과 생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못하다. 왕소군이 느꼈을 춘래불사춘이 2천여 년이 지난 우리의 감정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난 1년은 코로나19 사태로 내내 긴 겨울이었다. 그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의 출구를 새 빛과 함께 맞이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럴 상황이 아닌 듯하다. 

 다행히도 지난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접종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하니 굳이 절망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다.

 이해인 수녀 또한 ‘봄 인사’라는 시에서 ‘다시 시작하자/ 높이 올라가자// 절망으로 내려가고 싶을 때/ 모든 이를 골고루 비추어주는/ 봄 햇살에 언 마음을 녹이며/ 당신께 인사를 전합니다’라며 절망과 우울함을 이겨 내고 다시 시작하자고 ‘봄’을 예찬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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