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법조인들은 대개 보수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법을 해석하거나 집행할 때 ‘법적 안정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법적 안정성’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법에 의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법의 해석과 적용이 오락가락하게 되면 합법과 불법 경계가 모호해져 국민들의 생활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법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질서유지 기능’이 상실된다. 그래서 법조인들이 법을 해석하거나 집행할 때에는 가급적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신중하게 판단을 하다가 ‘타임’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제27조 제3항), 법원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오랜 기간 판결을 미루는 경우가 있다. 국민들은 "법원이 눈치를 보면서 재판을 고의로 미루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법원뿐 아니다. 검찰도 때때로 어떤 사건들은 신속하게 수사하고 기소하면서 다른 어떤 사건들은 수사와 기소를 마냥 늦추는 경우가 있다. 

오죽하면 ‘선택적 수사’, ‘선택적 기소’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국민들은 검찰이 수사권·기소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남용한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늑장 재판’, ‘늑장 수사·기소’는 국민들이 법원과 검찰을 불신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법원과 검찰은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法諺)을 명심해야 한다. 

국회도 ‘늑장 입법’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달 초에 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당한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체적 경위에 대한 판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군인이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 사정이 발생한 것은 매우 안타깝다. ‘다른 사람에게 해(害)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폭넓게 존중하는 선진국 국민들의 관용(톨레랑스)의 문화를 우리 국민들이 본받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소수자 차별에 대한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일고 있고, 외국으로부터도 ‘인권후진국’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데 대해 국방부의 경직적인 태도에도 문제가 있지만 국회의 ‘늑장 입법’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 만일 국회가 ‘차별금지법’을 입법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핑계 삼아서 고용이나 교육·행정서비스 이용 등에서 누군가를 불리하게 대우하는 ‘차별’을 막고 시정하도록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참에라도 국회는 지난 10년이 넘도록 방치해 온 차별금지법 입법에 즉시 나서야 한다.

최근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의 부동산 투기 사건이 드러나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동산 개발 정보를 다루는 공직자들의 정보 유출과 사적 활용을 제한하고 처벌하는 법과 제도가 여태껏 미비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지경이니 지난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공직자들이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갖고 개인적인 치부를 해왔을까. 

만일 국회가 ‘이해충돌방지법’을 입법했더라면 이런 일이 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국회는 이 법의 입법을 10년이 다 되도록 방치해 왔다. 여야는 LH 사태를 두고 서로 ‘남의 탓’만 하면서 정쟁을 벌일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즉시 필요한 입법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늑장 입법’으로 인해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 꼭 무슨 일이 크게 터져야 입법 등 제도개선을 검토하는 ‘뒷북치기 식 늑장 행태’를 보인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 증진을 위해 현재 그리고 장래에 무슨 법이 필요할지 미리 검토하고 입법조치를 해야 ‘대형 사건·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최근 대한상의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 중 91.6%가 현행 법체계 문제점으로 ‘낡은 법제도’를 꼽았다고 한다. 법이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면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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