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승 사단법인 21세기안보전략연구원 원장
강석승 사단법인 21세기안보전략연구원 원장

주체의 왕국, 유사종교집단, 극장국가, 붉은 왕조(王朝), 고도(孤島)와 같은 국가, 시간이 멈춰 있는 사회 등 북한체제의 특성을 대변하는 용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도 최근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가 김정은 정권 10년 차를 상징하는 용어로 부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인민들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는 호언(豪言)장담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당 세포비서대회’ 폐회사에서 "그 어떤 우연적인 기회가 생길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 것도 없다"라고 단언하는 가운데 앞으로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도대체 김위원장은 어떤 의도하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를 새삼 강조하면서 이런 언급을 한 것일까? ‘고난의 행군’이란 용어가 북한 땅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급사(急死)한 김일성의 뒤를 이어 제2대 절대권력 세습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3년여의 기간 동안 ‘유훈(遺訓), 조문(弔問)정치’를 행해왔는데, 바로 이 기간을 전후해 수많은 아사자가 속출했었다. 

항간의 보도에 의하면 적어도 200만∼300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어죽었다"는 설(說)이 제기될 정도로 매우 엄혹한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를 통칭해 ‘고난의 행군시기’라고 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1996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은 사회주의 3대 진지를 튼튼히 다지며 백두밀영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북한 당국은 이 시기 인민들이 단순하게 먹지 못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봉쇄조치와 함께 매우 100년 만에 닥친 매우 큰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누적된 식량난 등 극심한 경제난으로 주민 동요와 체제 일탈현상 등 체제위기가 본격화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한다는 구호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고난의 행군’ 주장은 김정일 시대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제시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 시대 때부터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강조돼 왔던 것으로, 그 연원은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1938년 말에서 1939년 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북한의 우상화물인 ‘세기와 더불어’와 같은 저작물에서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항일 무장활동을 벌일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100여 일 동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중국의 몽강현으로부터 조선의 백두산지구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독창적인 유격전술과 혁명전사들에 대한 사랑,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의 공산주의적 의리에 기초한 끝없는 충실성, 숭고한 혁명적 동지애와 불굴의 투쟁정신이 있었기에 일제 수십만 대군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영하 40도의 혹한과 식량난 등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적어도 북한에 있어서 ‘고난의 행군’이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용어로 그 특성은 국가나 당차원의 배급 중단,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이 재연(再演)되고 있으니, 이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 민족의 재앙이자 북한 당국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김 위원장의 이런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한 정책 추진 의지와 입장은 "인민들이 굶어죽어도 체제생존과 보위를 위해서는 핵개발을 계속하겠다"는 ‘우물속의 개구리’와 같은 편협하고 근시적인 시좌(視座)에서 비롯된 것임과 동시에 ‘막가파식’ 극단적인 발상(發想)을 드러내는 것으로 북한 정권의 전도(前途)를 매우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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