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인천시 서구청장
이재현 인천시 서구청장

‘가왕’ 조용필의 전설적인 명곡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에는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라는 구절이 있다. 도입부 내레이션이 매력적인 이 노래 가사를 얼마 후면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하얀 산’이란 뜻을 지닌 킬리만자로라는 이름 자체를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깝게도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직접 걸어본 곳이라 애틋함이 더 크다. 

2002년 10월, 유엔(UN) 내 환경전담기구인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파견 차 케냐 나이로비에 머물 당시 아프리카 월력으로 5월 어느 봄, 킬리만자로 산행에 나섰다. 현지인들이 ‘신령의 산’이라며 신성시하는 곳이자, 전 세계 산 마니아들이 꼭 한번 가 보기를 꿈꾸는 곳이기도 하다. 꼬박 엿새가 걸리는 산행 끝에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다. 첫날은 밀림지대를 지났다. 빽빽하고 키 큰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원숭이도 만난다. 

이틀째부터는 걸어 오를수록 나무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도 차이 때문인지 야생화 종류도 다르다. 사흘째부터는 해발 3천m 높이다. 이때부터는 빛이 사라진 뒤 보이는 신비로운 밤 풍경에 더 눈길이 갔다.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른다. 가로등이 없으면 옴짝달싹 못 하는 도심과 달리 휘황찬란한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곳곳을 환히 비춘다. 손으로 몇 개는 딸 수 있을 듯하다. ‘이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음 날부터는 나무 대신 선인장류가 등장한다. 다채로운 선인장 꽃이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마지막 산장까지 가는 길은 황야를 걷는 기분이다. 풀 한 포기 볼 수 없고, 가끔씩 밀려오는 거대한 구름 덩어리가 한동안 몸을 휘감고 간다. 해발 5천895m의 최고봉, 우후루 피크(Uhuru Peak)에 도전하려면 밤 12시에 출발해야 아침에 정상을 밟을 수 있다. 새벽 5시께, 산머리 가까이에 섰다. 발아래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듯 온 세상이 하얀 구름으로 덮인다. 잠시 뒤, 태양이 여러 빛깔을 띠며 구름을 뚫고 나온다. 그러나 만년설은 볼 수가 없었다. 정상에 섰을 때는 눈 없는 맨땅이었다. 

유엔환경계획은 2018년 말 "1만2천여 년 동안 녹지 않았던 킬리만자로 빙하가 녹고 있다. 지금 속도라면 2030년에 만년설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2019년 3월께 현지 기상전문가는 "탄자니아의 탄소 배출량은 0에 가깝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우리가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이 변화는 누구의 책임인가"라고 물었다. 과연 누가 주범일까? 현지인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지구상 모든 문명국의 책임이다. 기후변화가 킬리만자로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만년설뿐이 아니다. 우기엔 비가 마르고 건기엔 폭우가 쏟아지는 이상징후가 나타나면서 탄자니아의 3대 수출품 중 하나인 커피 농사는 거의 전멸했다. 

어떻게 해야 킬리만자로의 눈을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무분별하게 자원을 낭비하고 자연을 해치던 과거에서 탈피해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오염을 막아내며 자연이 보내오는 SOS에 즉각 응답해야 한다. 지금은 ‘함께’와 ‘나눔’에 기반해 이 상황을 돌파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고 내린 그 시간은 자연과 인간이 상생할 수밖에 없음을, 상생을 위해선 인류가 달라져야 함을 알게 해줬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