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고위직 청문회를 보면서 화려한 이력을 가진 후보자들의 삶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시커먼 욕망이 드러나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삶이 소위 ‘잘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겁니다. 「카리스마 유머」(김진배 저)에 저울로 물건을 달아 파는 상인과 그의 아내가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남편이 "여보, 오늘 저 집에서 물건 사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의아해하는 부인에게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우리 집 저울을 오늘 빌려 갔거든."

욕망을 부채질하고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기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쩌면 욕망을 조절하는데 무기력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만 조절한다고 해서 거대한 욕망의 파도가 잠잠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지 두 가지 비극만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얻지 못해도 비극이고 얻어도 비극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요? 지금 내게 없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원망과 분노와 절망감에 빠집니다. 한편,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욕망을 부채질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원하는 것을 손에 쥐든 쥐지 못하든 욕망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주인인 셈입니다.

‘갈애’(渴愛)라는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뜻합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김사업 저)에서 저자는 인도 민화를 통해 갈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9마리 소를 가진 부자가 한 마리를 더 채워 100마리를 만들려고 하자, 자신이 가진 99마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모자라는 한 마리만 크게 보였습니다. 어느 날,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다음 날, 누더기를 걸치고 멀리 사는 옛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소 한 마리만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하고 착한 친구였습니다.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너무 궁핍해서 살기 힘들다네. 내일 아침 끼니도 없네. 제발 좀 도와주게."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옛 친구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네. 옛날에는 이웃에 살아서 자네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네만, 멀리 떨어져 살고부터는 자네 일을 잊고 있었네. 친구로서 면목이 없네. 내게 소 한 마리가 있네. 소가 없어도 나는 집사람과 힘을 합해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테니 소를 가져가게. 부디 힘내게나."

부자는 고맙다는 말을 건성으로 남기고는 얼른 소를 끌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친구야 어떻게 되든 100마리를 채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만, 우리로서는 답해야 할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친구의 유일한 소를 가져간 사람과 자신이 가진 소를 선뜻 친구에게 내어준 사람 중에서 어느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민화 속 부자의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을 ‘갈애’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그는 100마리가 아니라 200마리를 목표로 또 다른 수탈에 눈을 돌릴 겁니다. 청문회장에서, 또는 LH 사태에서 우리는 갈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사회 지도층의 민낯을 보고 있습니다. 갈애가 만연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당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나요?" 이 질문에 갈애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적어도 ‘100마리를 채우려는 것’이라는 답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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