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바나나 껍질을 벗길 때 꼭지부터 벗겨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숭이들은 꼭지를 움켜쥐고 반대쪽 끝부터 벗긴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훨씬 수월했고 이물질이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동안은 예전처럼 껍질을 벗기는 제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요즘 매우 거셉니다. 변화는 기존의 것이 파괴돼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변화를 쉽게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변화를 이뤄내지는 못합니다. 파괴에 따르는 저항의 강도가 무척 세기 때문입니다.

「인생 수업」(법륜 저)에서 저자는 "죽은 뒤 장례를 크게 치르든 제사를 거창하게 지내든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문제이다. 그런 문제로 싸우지 마라. 합장하고 싶으면 합장하고 화장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말합니다. 10남매인 저의 집안도 비슷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홉 번째인 저는 집안의 대소사를 형님들의 결정에 따르곤 했습니다. 어느 날, 큰형님과 둘째 형님이 제사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옛 방식 그대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믿는 큰형님은 교회에 다니는 둘째 형님의 제사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종교를 갖지 않는 한 이런 갈등은 어디서나 일어날 개연성이 큽니다.

저자는 원효 대사의 깨달음을 전합니다. "원효가 비를 피하러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잤다. 깨고 나니 무덤 속이었다. 다음 날 원효가 잠을 자는데 자꾸 귀신이 나타났다. 그때 원효는 깨달았다. ‘무덤이라 생각하기 전에는 잠을 편히 잤는데, 무덤이라 여기니 번뇌가 이는구나. 모든 게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무덤은 말이 없다. 문제가 있다고 여기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식에 구애받지 마라." 형식은 전통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전통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견고한 전통을 깨야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변화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마치 닭장 속에서 편히 살던 닭이 닭장을 박차고 야생으로 나갔을 때처럼 말입니다. 

「바보 되어주기」(안순혜 저)에 짧은 우화가 나옵니다. "절대 낮은 곳에 집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어미 새의 유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새는 귀찮고 힘들어 낮은 가지에 집을 지었다. 어느 날 농부가 지게에 나무를 지고 가다가 새 둥지를 무너뜨렸다. 어린 새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집을 지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막대기로 둥지를 부수었다. 게으른 새는 다시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어느 날 어린 새는 귀여운 새끼를 낳았다. 낮은 가지 위의 둥지를 본 뱀이 새끼를 잡아먹었다. ‘어미 새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 자식이 죽어서야 비로소 깨닫다니!’"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힘을 가진 계층의 기득권 포기가 전제돼야 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일갈이 떠오릅니다. "지식인은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은 이윤에 흔들리지 않으며 전문성에 묶이지 말고 경계와 장벽을 가로지르는 연결점을 만들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욕구가 있어야 한다." 바나나 껍질을 새로운 방법으로 벗길 때 처음에는 무척 불편할 겁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만 반복하면 이내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진 그것이 곧 변화했고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미리 위험하다며 안전이 보장된 닭장 속에서 안주하는 닭에게 밝은 미래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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