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성 인하대 사학과 교수
임학성 인하대 사학과 교수

‘억강부약(抑强扶弱)’이란 한자성어가 있다. 이는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다"는 말인데, 최근 차기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국정 핵심 목표로 내세워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대한민국을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대동세상(大同世上)’"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억강부약을 최선으로 생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임금이나 지식인 가운데 억강부약을 치세 철학으로 삼은 이가 적잖다. 

대표적으로 조선 영조 임금은 힘없는 백성들이 권력자에게 집과 땅을 빼앗기는 세태를 보고 ‘억강부약’ 네 글자를 늘 마음속에 새겨 통치에 최우선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중국 주나라 때 억강부약하고 권세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벼슬아치 중산보(仲山甫)의 사례를 들면서, 작금의 정치가들을 보면 권력에 아부하고 권세를 탐하다가 스스로 멸망을 취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19세기 말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崔漢綺: 1803~1879)는 저서 「인정(人政)」에서 강자가 그 강함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고 약자가 그 약함을 잘 보존해 걱정이 없게 돼, 제각기 자기의 분수에 편안하고 자기의 맡은 직책을 잘 처리하게 되면, 비록 억강부약하는 정치가 없더라도 저절로 억강부약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식인 혜강의 고뇌가 행간에 스며있다 하겠다. 

물론 다산과 혜강 모두 억강부약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고 있다. 혜강은 속된 견해만을 갖고 매번 억강부약하는 것만으로 일을 삼으면, 강하고 세력 있는 자는 겁내어 떨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은 태평을 즐기게 되는데, 이는 저급(低級)에 해당한다고 봤던 것이다. 억강부약은 치세의 진리이지만 그 방식에서는 인의(仁義)에 따른 조화가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한 우려였다. 

이재명 지사가 "억강부약하여 대동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보수 언론과 야권에서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를 누르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돕자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반자본주의적’ 불순 사상이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보수 언론과 야권 주장은 억강부약의 본의를 알면서도 이른바 정치적 공세를 하기 위한 ‘저급’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설마 그 말의 본의를 모르고 한 공세라면 무식의 극치를 드러낸 것이겠고, 또 이재명 지사가 선언한 그 어젠다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라면 저질의 극치를 드러낸 것에 진배없다. 물론 건강하고 공정한 ‘강’, 대한민국 발전을 이끌어온 ‘강’을 그냥 ‘강’하다는 이유 하나로 ‘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이재명 지사도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겠다"고 그 대상과 방법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동안 ‘특권’과 ‘반칙’으로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및 법조계에 군림했던, 그래서 수많은 국민과 청년들에게 ‘공정’의 목마름을 절규케 했던 그런 강자들의 욕망을 ‘절제’시키겠다는 것이다. 혜강이 말한 강자가 그 강함을 멋대로 부리지 못하는 그런 식의 절제라 하겠다. 따라서 이재명 지사의 ‘절제’ 방법은 보수 언론과 야권에서 공세의 본질 내용으로 삼는 북한(?)의 인민재판식 처단이 아니다. 혜강이 ‘억강부약’ 방법으로 강조한 ‘인의에 따른 조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방식이어야만 다산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여민동락(與民同樂: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즐기다)’의 세상과도 서로 통한다 하겠다. 이재명 지사보다 이틀 앞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 또한 출마의 변에서 그 방법과 대상은 다르지만 ‘억강’을 강조하고 있다. 검찰총장 재직 시 살아 있는 권력(강자)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억강의 진정성을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 억강의 목적이자 구현인 ‘부약’과는 거리가 먼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가 억강한 이유는 오로지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었던 검찰개혁을 반대해 검찰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검찰 사수는 무소불위 강자의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오히려 측근들만 비호함으로써 검찰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윤석열의 공직 생활은 오히려 ‘부강(扶强)’에 가깝고, 그가 추구하려는 목표는 대동세상이나 여민동락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본다. 그렇다면 그의 통치 철학(?)은 ‘억약부강(抑弱扶强)’, 약자를 누르고 강자를 돕는 것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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