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김용길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한국전쟁 이후 인천 시내 여러 곳에 외국군 부대가 주둔했다. 부평 신촌에 ‘애스컴’이라고 불린 큰 규모의 미군부대가 있었고, 내가 살던 숭의동로터리 인근에도 영국군 부대가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본국에서 보급됐다. 그들이 식사 후에 생긴 음식 쓰레기를, 부대에 취업한 한국 근로자들이 유출해 동네에 팔았던 음식이 ‘꿀꿀이죽’이다. 돼지의 사료용으로도 이용돼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여겨진다. 

당시 서민들의 먹을거리라고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구호물자인 480양식(쌀)과 우유가루, 시중의 강냉이죽, 밀가루 정도였다. 먹고 사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시절이다. 꿀꿀이죽은 값이 싸고 맛도 괜찮아, 서민들의 한 끼가 됐다. 동네별로 판매 장소와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어릴 적 심부름으로, 어머니가 양푼과 돈을 주면 인근 동사무소 앞마당으로 달려가 줄을 서서 사오곤 했다. 아저씨들이 깡통에 막대기를 끼어 만든 국자로, 드럼통 잔반을 휘저으며 피난민 배급 주듯 퍼 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음식 쓰레기이다 보니 이쑤시개, 담배꽁초 등이 섞여 있었다. 군인들이 식사 후 식판에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이물질을 건져내고, 가마솥에 물을 넣고 끓여 식구들에게 나눠줬다. 가축이 먹을 것을 사람이 사다 먹고 살았으니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간혹, 꿀꿀이죽에 고기 몇 점이 들어 있으면, "오늘은 재수가 있네" 라고 너스레를 떨며 먹었다. 이따금 걸러내지 못한 담배 필터가 있을 때는 매우 황당하고 씁쓸했다. 지금은 경양식이 흔하지만, 당시 시중에서 볼 수 없는 서양음식으로 푸른 완두콩과 소스, 특유의 향이 어우러져 맛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창영동 경인철도 건널목 옆 몇몇 음식점에서, 단골 메뉴로 팔아 속칭 ‘꿀꿀이골목’이라고 불렸다. 주로 구루마꾼, 지게꾼 등 노동자들이 이용했다. 지금은 그 일대가 개발돼 이름만 남아 있다. 외국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은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줬다. 암암리에 거래되는 화장품은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인기였고, 송현동과 부평의 일명 ‘양키시장’에는 버터, 햄, 소시지, 통조림, 주류, 음료, 의류 등을 비롯해 TV, 라디오 등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이름까지 우스꽝스러운 ‘꿀꿀이죽’은 서민들의 일용?할 양식이었고, 명물 아닌 명물 음식으로, 인천시민들의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가족이 모여 돈가스를 먹으며 "나는 음식이 귀한 시절, 어릴 적부터 최고급 경양식을 먹었다"고 허풍을 떨어 한바탕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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