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변(禍變), 그 끔찍한 재앙은 찌는 듯한 삼복더위 중에 발생했다. 1762년 7월, 부왕인 영조는 차기 왕인 이선을 폐위하고 8일 동안 뒤주에 가둬 사망케 했다. 이를 역사는 ‘임오화변’이라 부른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기에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 일은 학술적으로도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파 싸움의 결과라는 학계의 통설에서 벗어나 왕과 세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가족사에 보다 세밀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살아서 부모·자식 간의 연을 다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가족사를 영화 ‘사도’의 관점으로 만나 보자.

 영조의 나이 마흔둘, 고령에 얻은 귀한 아들 이선의 탄생은 축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영민함으로 아버지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던 아들은 그러나 열 살을 전후해 꾸지람을 많이 듣게 된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잡음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부분에 있어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는 학자들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 이선은 그림 그리기와 무예가 글 읽기보다 좋았다. 성격도 자유분방해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아버지의 성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영조의 바람처럼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고, 부모의 자랑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비의 눈에는 늘 모자란 자식일 뿐이었다. 

 신하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차기 왕이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었겠으나 영조의 꾸지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끝이 없었다. 옷 매무새 하나까지 신하들 앞에서 엄히 꾸짖으니 세자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이후 아버지는 모든 재수 없는 일은 아들 탓으로 돌렸다. 가뭄이 지면 세자가 덕이 없는 까닭이었고, 홍수가 발생해도 세자가 부족해 그러하다 했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커지면서 세자의 가슴에는 울화가 쌓였다. 이후 세자는 자신의 화와 우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온갖 기행과 살인을 일삼는다. 결국 세자의 광증이 극에 달하고, 이를 벌하는 과정에서 아들 이선은 뒤주에 갇힌 지 8일째 되던 날 사망한다. 

 영화 ‘사도’는 ‘왕의 남자’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의 2015년 작품으로 픽션을 가미하기보다는 고증에 충실했다. 비극적인 8일을 중심으로 사도세자 이선의 28년간의 인생이 병렬적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뒤주에 갇힌 세자를 전면에 배치하고 이후 그 까닭과 어긋난 부자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영조를 대신해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잘하자, 자식이 잘해야 애비가 산다." 반면 광증이 짙어진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하소연한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그러나 아들의 한 맺힌 절규도 끝내 부자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부자간의 비극을 보고 있자니 아동심리 전문가 오은영 박사의 양육의 궁극적 목표는 ‘독립’에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영조 역시 세자가 훌륭한 왕이 되길 누구보다 바랐겠지만 그 과정이 지나치게 아버지의 규율 안에 통제돼 마찰을 빚었다. 왕과 세자라는 특수한 관계가 비극을 더욱 키운 부분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자식의 성향을 인정해 주고 자녀를 한 인격체로 믿어 주는 일.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 건강한 관계의 시작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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