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전재학 인천세원고 교감

독일 교육, 참 부럽다! 이는 한평생 교육자로서 느끼는 냉철한 판단에 근거한 소감이다. 더구나 한 나라의 고등학교 관리자가 기껏 타국의 교육을 부러워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냐고 질책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국가의 문화와 풍토가 다르다 해도 우리와 많은 점에서 닮은꼴을 공유하는 독일교육에 유독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항상 두 나라 간의 교육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그 사실을 규명하고 우리 교육을 되돌아보게 된다.

최근 독일의 상황을 보자. 2020년 9월 8일, 그리스의 레스보스섬에 있는 모리아 난민 수용소에서 불이 나 시설이 모두 타버린 큰 사건이 있었다. 이곳은 2천700여 명이 정원이지만 1만2천여 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모두 갈 곳을 잃었다. 다음날인 9월 9일,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4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다. 그들은 "국경을 개방하고, 난민을 신속히 데려오라!"고 주장했다. 12일, 유럽연합 10개 회원국은 부모와 함께하지 않은 미성년 난민 400명을 수용하기로 하고, 그중 독일과 프랑스가 100~150명을 받기로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독일은 현재 오랜 기간 대연정의 국가다. 하지만 여와 야의 정당이 공감을 나누며 난민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들도 뜻을 모았다. 1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재무장관은 난민 1천553명을 수용하기로 했음을 발표했다. 여기에 더해 놀라운 사실은 20일, 베를린에서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전승기념탑 인근 도로를 행진하며 "화재로 거처를 잃은 난민을 더 수용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앞서 시리아 내전 등으로 대규모 난민이 몰려든 2015년 이후 독일은 18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고 보도되었다.

최근 민족주의 사상과 자국 우선 정책으로 회귀하여 선진국들이 앞 다투어 경쟁하듯이 처신하는데 왜 그렇게 독일은 별종의 인간들처럼 난민 수용에 우호적으로 특별한 것일까?

필자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금할 수 없다. 결국 그에 대한 답을 찾게 됐다. 그것은 첫째, 난민 문제를 다루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둘째, 사회복지나 직업교육을 통해 난민들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력으로 양성하는 정책. 셋째, 눈앞의 이익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독일 문화 등에 있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2018년,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입국해 떠들썩했던 사건이 기억나는가? 당시 무비자로 입국한 예멘 난민은 591명이었다. 그때 ‘제2의 유럽 난민 사태가 우려된다’, ‘정부가 혈세 138만 원씩 지원하고 있다’는 등등의 소문들이 떠돌았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민족으로 손색이 없는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교육했는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 중에 극소수에게만 난민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는 역사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의 중심에 우뚝 섰던 우리에게는 너무나 편협하고 속 좁은 민족주의적인 조치였다. 저마다 ‘테러’의 위험을 내세운 변명 아닌 핑계가 정말로 부끄러웠다. 독일과 한국 간의 이런 극화된 정책의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은 유럽과 전 세계를 뒤흔든 68혁명 이후 50년 동안 ‘경쟁교육’을 청산한 ‘교육 개혁’을 이루어낸 결과다. 모든 억압과 차별을 거부하고 ‘민주주의 다 해보자’는 독일의 68혁명 당시, 우리는 군부독재에 의한 학교병영화를 이루었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제외된 결과가 아직도 경쟁 교육에 목숨을 걸고 교육과 청소년을 피폐시키고 있다.

이제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제로 섬(Zero sum)’ 경쟁과 줄 세우기 교육이 아닌 ‘함께 행복하게 잘 살자’는 교육으로의 전환은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는 긴박한 국가적 과제다. 우리는 언제까지 선진 독일 교육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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