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이강동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사현장에서 조선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다. 금속활자, 물시계의 주전, 천문시계의 일성 정시의, 총통류, 동종이 나왔다. 동국정운식 한글 금속활자와 한문 금속활자들은 항아리에 담겨 있는 모습으로 출토됐다. 출토된 한문 금속활자는 1434년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436년 인쇄된 자치통감 글씨체와 유사해 전문가들은 갑인자로 보고 있다. 

항아리 속 금속활자가 출토된 인사동 지역은 고려시대에도 서울의 한복판이었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은 조선은 1395년 종루를 건립한다. 종루에 오르면 서울의 동서남북이 보여 화재를 감시하는 망화루로도 사용됐다. 종루가 건립된 지역이 운종가였다. 종루의 동쪽을 열운가, 서쪽을 운종가라 불렀다. 인사동은 당시 운종가 지역이었다. 교통의 요지라 십자가라는 지명과 종로·종각의 지명도 있었다. 

서울 한복판 땅속 항아리에서 금속활자가 출토됐다는 소식에 고려의 금속활자본 상정예문을 지나칠 수가 없다. 고려는 1232년 인천 강화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상정예문을 세상에 내놓는 문화국가로 발전돼 있었다. 본인은 고려의 금속활자본 상정예문이 일본 소재 재단법인 동양문고에 소장돼 있음을 확신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동양문고 설립자 고(故) 교사쿠는 일본인 사회에서 ‘조선 문헌의 보호자’, ‘조선 연구의 최고 열심자’라는 별칭도 갖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고서를 연구하고 많이 수집한 사람이었다. 

전문가들이 항아리 속에서 나온 금속활자를 갑인자로 보고 있는데, 갑인자로 인쇄된 조선시대 고서들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강탈해 갔다. 

1585년 일본을 통일 평정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제107대 고요오제에(1586~1610)일왕이 즉위하면서 태정대신으로 임명된다. 일왕에게 도요토미라는 새로운 성씨를 받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별칭:풍국대명신)로 불렀다. 1592년 도요토미의 계획에 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들이 퇴각하면서 조선의 유물들과 고서들을 강탈해 가져 간 목록을 살펴보면 고대 활자·활판, 조선시대 활자·활판, 한적활판본 23부, 군서치요, 정여록, 효의록, 공자가어, 정관정요, 동감, 대장일람, 예기집설, 예기정의, 대학연의, 상서정의, 전한서, 명신언행록, 청파집, 문선, 신편 고금 사문류취, 주역, 소문정종, 황명개운록, 신판황명역조, 자치통감, 궐리지, 춘추호씨전, 조선본432책 46부, 조선고간독법첩류(조선역대 임금들의 어필) 191책 150부, 석유의 유고, 서축 등이다. 일본 홍엽산 문고, 족리학교문고, 동춘사(만년사)에 나뉘어 소장돼 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1403년 처음 주조·제작됐다. 금속활자 종류는 태종의 계미자, 세종의 갑인자, 문종의 임갑자, 세조의 을해자(을유자), 성종의 신묘자·계축자, 숙종의 한구자, 영조의 임진자, 정종의 정유자·임인자 등이 있으며 금속활자의 명칭은 위부인자·실록자·생생자·정리자 등이 있다. 

태종은 나라에 서적이 부족하니 서적을 많이 인쇄할 수 있는 사서와 좌전과 같은 문자의 금속활자를 제작하라고 이직·이담·박석명에게 책임을 주고 주자소를 설치해 계미자를 제작하게 됐다. 항아리 속에서 나온 금속활자를 갑인자로 보고 있는데, 갑인자는 세종이 시력이 나빠지면서 천자문의 문자처럼 활자를 크고 단정하게 제작해 서적을 인쇄하라고 집현전 집제학 김돈에게 지시 갑인자 20만 개를 주조·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구리 금속으로 제작된 조선시대 첨단 과학제품들을 고물로 취급하고 항아리 속에 모아 뒀던 조선시대 그이에 의해 과학기술의 유물들을 다시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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