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안정헌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무덥던 2021년의 여름 끝자락에 늦장마가 찾아왔다. 여기저기 물난리로 힘겹던 날들도 어느새 새로운 계절에 슬그머니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백로(白露)가 찾아와 가을의 한가운데에 들어서는 듯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음력 8월을 중추(仲秋)라고 했던가, 추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우리 옛말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풍요롭기도 하지만 날씨도 화창한 것이 코로나 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한다. 

그런데 인천의 9월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필자는 지난해 이맘때 인천의 9월을 얘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언급한 바 있다. 한쪽에서는 기념식을,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추모식을 하고 있는 곳. 그런데 그것 말고도 인천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875년의 ‘운양호 사건’이다.

인천광역시의 강화도에서는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서양의 ‘약탈제국주의’(김용구) 국가들이 조선을 침탈하면서 내세운 것이 문호 개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동안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이 보낸 서계가 요식과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해 접수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조선의 해안을 무단 침입했다. 그러면서 사건을 만들려고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었는데, 1875년 9월 20일(음 8월 21일)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운양호의 종선이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하면서 서로 간 접전이 발생했다. 이에 운양호는 영종진을 침탈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이날의 전투 상황을 신봉승은 소설 「찬란한 여명」 3권, 「운양호사건」(1995, 갑인출판사)에서 묘사하고 있다.

"운양호는 마침내 초지진 포대를 향해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중략) 운양호는 초연이 난무하는 초지진 포대를 지켜보면서 서서히 방향을 바꾸더니 영종도의 공략을 시도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접근과 동시에 맹포격을 가하면서 육전대까지 상륙시키는 것이 아닌가. (중략) 영종도를 유린한 일본국 육전대는 민가에 불을 지르는 등의 만행을 자행하면서 조선군의 병장기와 군량을 약탈하였다. 그들에게는 일방적인 승리였으나 조선군으로서는 참담한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 등의 인명의 손실을 입었고 대포 36문, 화승총 130자루를 잃었다. 여기에 비하여 일본군은 단 2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이었다."

인용한 부분에서 당시 영종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배의 국적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경기감사 민태호의 장계를 보면 "저들의 배가 연기를 피우고 닻을 올린 후 앞바다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전군이 전부(顚부)되고 화염이 성 안에 가득하여 민가가 연이어 타면서 공해(公해)까지 불길이 미쳤기 때문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토성(土城)으로 퇴군하였는데 죽거나 다친 군졸의 숫자를 아직 세지 못하였으며 첨사의 인신(印信)까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고종실록」, 고종12년 8월 25일)라고 돼 있다. 

이처럼 조선의 조정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해안 방어가 직책인 ‘영종첨사’는 자기 살 궁리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만세교’를 넘어 자연도로 피신했다. 이처럼 일본의 피해에 비해 조선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초지진에서의 전투가 조선군의 선공에서 비롯됐다고 하며 배상과 함께 조약 체결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것이 바로 1876년 강화도에서 이뤄진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이다. 이후 조선은 제국자본주의 세력에 무방비로 놓이면서 급속하게 반(半)식민지로 전락됐다 할 수 있다.

가을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행사가 취소되거나 축소됐다. 2005년부터 다시 시작된 추모제(음력 8월 22일)는 올해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경건하게 진행될 것으로 생각된다. 비극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고 계획하기 위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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