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기억이 맞는다면 2008년은 더위가 유난히 길었다. 가을이 무르익을 계절로 이어진 무더위는 겨울 철새가 찾아오는 11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먹이가 풍부한 아무르 일원에서 여름을 지낸 철새들이 혹한의 겨울이 다가오기 전 무리로 날아와 내려앉는 곳은 우리 갯벌이다. 소금기가 있으니 웬만한 추위에 물이 얼지 않을 뿐 아니라 먹이도 풍부해 우리 갯벌은 세계 주요 철새의 이동 통로와 도래지로 명성이 높다. 인천도 중요한 철새도래지가 분명하지만 광활했던 갯벌이 거의 사라진 현재, 명성은 퇴색됐다. 맹렬하게 갯벌이 매립되던 2008년, 기억을 더듬던 철새는 인천을 잊지 않았다.

 남동산업단지 유수지는 홍수를 대비해 승기천으로 흘러드는 물을 가득 채우지 않는데, 2008년 무더위는 유수지 가장자리 갯벌의 생기를 떨어뜨렸나 보다. 산소가 스며들지 못하자 자연의 가장 강력한 독소인 보톡스를 내놓는 보툴리눔균이 발생했고 번진 상태였다. 시베리아와 아무르 일원에서 쉬지 않고 날아온 철새들은 한국 서해안 갯벌에서 내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남동산업단지 유수지에 철새 무리가 얌전하게 내려앉은 모습을 봤을 것이다. 

 공중에서 본 유수지 철새들은 움직임이 없거나 둔했다. 안심하고 내려간 철새들은 먼저 내린 철새 주변에 구더기들이 떠다니는 걸 봤고 허겁지겁 먹었다. 먹이를 보면 허기가 심해지는 건 비슷한 모양인데, 아뿔싸. 먼저 내린 철새의 옆구리에서 빠져나간 구더기는 보툴리눔균에 감염됐고, 구더기를 먹은 나중에 내린 철새도 감염되고 말았다. 연쇄반응은 11월 중순 지나 찬바람이 일 때까지 계속됐다.

 균을 정제하면 성형외과에서 주로 처방하는 보톡스를 분리할 수 있다는데, 근육을 일정 기간 마비시키는 보톡스와 달리 보툴리눔균은 마비돼 움직이지 못하는 철새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 사실을 나중에 파악한 환경단체에서 하필 찬바람 부는 남동산업단지 유수지와 주변 갯벌에 모였다. 가을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갯벌에서 꽹과리를 치며 내려앉으려는 철새들을 쫓아내던 회원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얌전하게 떠 있던 철새를 구조하려 덥석 안으면 순간 고개를 뚝 떨어뜨려 죽으며 몸에서 구더기를 우수수 쏟아내는 게 아닌가.

 냉방기를 모르던 캐나다 도시에 올 여름 49.5℃의 폭염이 닥쳤다. 난방이 필요치 않던 텍사스에서 분수가 겨울철에 얼어붙더니 여름에 접어들자 이변이 터진 것이다. 체온보다 10여℃ 높은 기온이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 도시를 데웠고 감당할 수 없는 산불이 번졌다. 그 사이, 사계절 일정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 폭우가 쏟아져 150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더니 도쿄 올림픽이 진행되던 시기 터키와 그리스는 체온보다 높은 온도에 헉헉대는 도시를 강력한 산불이 휘감았다. 시베리아는 어땠을까? 미국·터키·그리스 피해를 합친 면적의 3배 이상의 산림이 불타고 말았다.

 1998년 여름, 하루 600㎜의 강우로 강화는 깊은 상처를 받았는데, 이후 기상이변이라는 말은 일상으로 다가왔다. ‘관측 이래’ 최고 또는 최대의 기록을 경신하는 기상이변이 이어진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최고 기상이변이 2000년 이후 집중된다. 한결같이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기상이변들은 점점 상상을 초월하는데, 우리는 아직 견딜 만하다. 올 여름 폭염주의보가 30일 넘게 이어졌지만 냉방기 보급 덕분인지 희생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예외일까?

 2008년 보툴리눔균이 물러난 덕분일까? 그 무렵부터 남동산업단지 유수지에 저어새가 둥지를 틀었다. 오염된 개흙을 긁어모아 쌓아 놓은 작은 섬에 둥지를 쳤던 재갈매기가 떠나자 세계적인 멸종위기 저어새가 찾아온 것인데, 해마다 잊지 않고 유수지를 찾아온다. 한때 700마리로 위축된 저어새가 4천 마리 이상 늘어난 데는 유수지도 기여했을 텐데, 기나긴 폭염 때문일까? 보툴리눔균이 다시 창궐했고 저어새와 오리 종류 수백 마리가 죽고 말았다. 관리자의 신속한 대처로 2008년 비극의 재발은 막았다는데 안심해도 될까? 기상이변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일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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