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환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명승환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한동안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과 강의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고, 지금까지도 청소년부터 직장인까지 만인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너무 어려운 화두를 꺼내서 철학적 지식을 논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적어도 이해는 할 필요가 있어 쉽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샌델 교수는 벤담의 공리주의,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용인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국가가 나서서 소수의 행복도 보살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선’은 주인인 국민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공동선의 목표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사실 샌델 교수의 사회적 정의는 존 롤스의 ‘정의론’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기본적으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개인 간 생물학적 차이와 자라난 환경 등 개인적 차이를 인정하되 자유와 평등의 기본원칙을 지키면서 극단적인 불평등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인과관계가 분명한 합리적 선택을 추구하되, 안정적인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약자에게 좀 더 기회와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차등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만, 다른 점은 존 롤스는 국가와 정부의 중립적인 태도(합리적 선택)와 정책을 강조하고, 샌델은 국가와 정부는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공동체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공론화 과정을 강조했다. 그리고 공동체를 통한 문제 해결을 제안했는데, 바로 이 점이 현재 소셜미디어를 통한 참여와 공론화를 중요시하는 ‘거버넌스(협치)’와 잘 부합되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 설명이 필요한 것 같지만 결국 요지는 한정된 자원과 예산을 어디에 먼저 쓰고, 그 분배 과정을 어떻게 누가 주체가 돼 결정하느냐의 문제로 정리될 수 있다.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 이후 ‘공감의 속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피력한 평범한 본인 ("‘스마트정부’ 전제는 신뢰와 공감", 문화일보, 2018년 2월 7일)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사실 대한민국의 사회적 정의는 독재의 억압에서 벗어나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를 갈망한 국민들의 처절한 저항과 피나는 노력으로 성숙돼 왔다. 서구의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수세기에 걸친 철학적 노력과 역사와 경험을 우리는 불과 반세기 만에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우리는 이제 직접 국민이 빛의 속도로 언제 어디서든 대통령에게 직접 사회적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라고 재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기에는 공론화 과정과 민의 수렴, 정책 집행 절차의 공개와 평가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전자민주주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월등하게 잘 갖춰져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가? 

 그 이유는 어쩌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집착하고 있는데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숲은 아마도 자유로운 부의 축적과 균등한 배분,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성, 가족-공동체-사회 속에서의 행복 추구가 가능한 사회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에 앞의 현인들과 석학들이 주장한 숲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압축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 과정으로 인해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부분이 많고, 아직도 여기저기 불평등·불공정한 모습과 관행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기억조차 힘든 유년시절부터 주어진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야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조기교육, 선행학습, 학원교육의 악순환의 고리를 통해 대학입시에 올인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찾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청년들의 한숨소리뿐이다. 

 사회적 정의란 나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도 최신의 사회적 정의에 가장 가까운 경지에 도달했는데 무엇이 이렇게 발목을 잡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그들만의 리그들이 번갈아 가며 싹쓸이와 한풀이를 반복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며, 전근대적 권위와 기계적인 관료주의·부패가 만연돼 있다. 그 리그에 속해 있지 않으면 사회적 정의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정치적 한정치산자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광기 어린 리그이다. 그래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원칙도 없고, 과정도 불분명하고, 설명도 없고, 결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더 높은 자리와 지치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만이 이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영웅이 된다. 폭주하는 부동산 열차, 세금 폭탄, 줄 세우기 대학평가, 부모 찬스, 인서울, 스카이·서성한…. 우리 사회와 나의 삶의 목적과 목표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은 아닌가?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