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20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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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다 침몰된 무역 선박에서 건져 올린 고려청자 유물전시회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고려는 청자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높이 평가했다. 도자기 색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기술력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고려는 도자기 제조 생산 기술의 표준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감, 조각, 부조, 투조, 비조, 형물, 염회, 과학적 가마 구조, 흙과 돌가루의 종류와 배합, 잿물의 종류, 불의 조절, 도공의 종합적 미술 감각에 숙련된 솜씨와 정성이 더 해져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색상이 발현된된다는 것이다. 문양과 종류가 다양한 청자, 백자, 녹자를 고려의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만들어 냈다. 청자, 백자, 녹자에 유약을 사용한 것도 고려가 처음 시도한 기술이었다.

청자는 중국에서도 제조·생산됐다.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성주요, 송나라의 성요, 여요, 용여 가마터에서 제조·생산되는 청자를 최상급으로 여겼다. 중국에서 도자기가 활성화됐던 시기는 중국 문화의 융성 기간이었던 1119~1316년이다. 중국에서도 청자가 생산되고 있었음에도 송나라의 「수중금」이라는 책에 감서 내주, 단연, 휘묵, 건주차와 함께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이라 평가하고 있다. 송나라의 관인 서긍도 고려청자의 색상은 푸른 빛을 내고 있는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비색이라 부른다고 했다. 솜씨가 공교하고 색상이 윤택해 더욱 아름다운 고려청자라고도 했다. 

독보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의 고려청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 수없이 많았다. 인천 강화에 있는 가릉, 곤릉, 석릉, 홍릉의 고려 왕릉에서 도굴된 것으로 보이는 용 문양과 학 문양의 청자 등 일본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는 최상급 고려청자 243점이 고려 건국 1천100주년이었던 2018년 9~11월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서 ‘고려청자, 비취의 반짝임’ 특별전을 통해 공개됐다. 

고려청자는 전국 곳곳에서도 발굴됐다. 2018년 10월 인천시 서구 검단신도시 공사 현장에서도 참외 문양의 주전자가 출토되기도 했다. 고려 가마터 개성 용수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 전북 무안군 줄포, 전남 강진군 대구면등에서 청자, 백자, 녹자, 금획 항아리들이 대규모로 제조·생산돼 국제 교역품으로 수출됐다.

948년 여진족(물길·말갈)들이 고려를 방문해 선물을 건네면서 교류와 교역이 시작되고, 중국과의 교역은 950년 시작된다. 주나라, 송나라, 원나라, 여진, 몽골, 일본에서 사신과 상인들이 찾아온다. 1073년 개성 만월대 신봉루에서 열린 팔관회 행사에도 이웃 국가의 사신과 상인들이 방문해 선물을 주면서 교류와 교역을 겸하는 큰 행사가 있었다.

고려는 신라에 이어 동아시아 지역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바닷길 항로를 개척하는 일은 고려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중국 여순, 대련, 산동의 항로와 1281년 고려 수군이 습격하고 1377년 정몽주가 특사로 방문했던 일본 큐슈로 가는 항로가 있었다. 300명이 승선할 수 있는 전함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고려는 무역선도 많이 갖고 있었다.

선박 건조 기술이 뛰어났던 고려는 전함과 선박을 건조해 수출하는 전담 부서인 사수사라는 기관이 있었다.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있는 고려는 이웃 국가와의 교역에 적극 나선다. 수출품은 선박, 청자, 백자, 녹자, 종이, 향료, 칠기, 악기, 염직(금을 직물에 입사시키는 기술. 청색, 황색, 붉은 자색, 붉은 홍색, 녹색, 자색, 주색 등 오행사상에 의해 7가지 색만 사용해 직물을 생산), 금획(금으로 그림과 무늬를 수놓은 것) 항아리였다. 1297년 고려 사신 황서가 금획 항아리를 중국 원나라에 선물로 가져가기도 했다.  서해 바다로 중국과 일본으로 가고 오는 고려의 무역 선박 이름은 초마선과 평저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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