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누구나 찬란한 성공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나 좌절하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 달리다 보면 성공의 문턱에 닿는 그런 날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성공 역시도 영원하지 않고 다시 고통 속으로 빠져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것,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이 이렇게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이뤄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패’와 ‘고통’ 쪽을 더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을 잘못 해석하면 그 고통이 우리를 영원히 일어설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발명왕 에디슨은 "실패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이 포기하는 그 순간 자신이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깨닫지 못한다"고 했고, 시드로우 백스터는 "장애물과 기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모든 기회에는 어려움이 있고, 모든 어려움에는 기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뿌리 깊은 희망」(차동엽 저)에서 저자는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 필요한 게 악천후다. 농부는 봄날의 좋은 날씨가 식물의 뿌리를 얕게 내리게 해 생존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면 태풍이 왔을 때 쉽게 뿌리가 뽑히게 된다. 인생도 같다"라고 삶을 설명합니다.

세 사람 모두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텐데, 고통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길래 고통을 마주하라고 말하는 걸까요? 

오물이 들어와 컵 속의 물을 오염시켰다고 원망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컵 속 물을 바닷물이라고 생각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오물이 바다에 떨어져도 바다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까요. 작은 상처에도 주저앉아 절망하는 것은 상처를 준 그 사람이나 그 일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컵 속의 물이라고 자학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물이나 상처가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 말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컵 속의 물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으니까요. 이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는 나를 바닷물로 여길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고통이나 상처는 나의 실상을 보게 하고, 그 고통과 상처가 내게 말해 주고 있는 메시지를 찾아 도약의 길로 나아가게도 합니다.

브라이언 카바노프는 「꿈꾸는 씨앗」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위대한 고통을 치러야만 비로소 얻어진다면서 ‘전설의 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다. 울음소리는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 둥지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새는 가시나무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으면 몸을 날린다. 죽어가는 새는 그 고통을 초월하면서 이윽고 종달새나 나이팅게일도 따를 수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자신의 목숨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온 세상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며 그의 노래를 듣는다."

그랬습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그 고통과 어우러지면서 겪는 심신의 상처가 훗날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남길 겁니다. 그래서 에디슨이 실패는 성공에 그만큼 가까이 간 것이라고 했고, 백스터는 어려움을 기회로 바라보는 태도만 갖춘다면 어느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은 아닐까요? 맞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든지 너그럽고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의 변화는 성공으로 가는 문을 열어줄 겁니다.

전설의 새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하루하루를 마치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혼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면 어느 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부푼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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