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운 가평군 자치행정과 대외협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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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80하고도 10년, 90살에 최근 건강생활을 위해 우리에 갇혀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오직 보행기만이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강력한 기계 종마라네. 네 개의 바퀴에 파란 철골과 부드러운 좌석의 보행기는 나에게 많은 애정을 가져다 준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나를 따라다니며, 내 허리둘레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꾸짖는다.(후략)" <캐나다 가평전투 참전용사 마이클 추보카의 시 ‘90세에 보행기와 함께 한 내 인생’ 중>

 며칠 전 캐나다에 살고 있는 지인이 가평전투 참전용사인 마이클 추보카 씨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왔다. 추보카 씨는 현재 90세의 고령이다. 2년 전부터 심한 관절염으로 캐나다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추보카 씨는 1931년 캐나다 매니토바주 브랜든시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유년시절도 잠시, 아버지가 철도 보선공으로 일하다 심한 부상을 당해 1급 장애인이 되자 재봉일과 일용직 노동을 하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됐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어머니 일터에서 채소를 파는 것을 시작으로 빵가게, 주택 건설현장, 소시지 공장, 전통시장, 농장, 철도역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의 나이 18세였던 19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하고 캐나다 정부가 한국에 파병할 군인들을 모집했다. 나이가 어려 자격 요건에 미달하자 나이를 한 살 부풀려 입대,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여단 2대대에 배치돼 참전한다. 

 운명의 가평전투! 중공군은 1951년 4월 23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 507고지(목동농공단지 뒷산) 호주군 방어진지를 공격해 32명의 호주군을 사살하고 59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4월 24일 밤 5천여 명의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677고지(마장초등학교 뒷산) 캐나다군 진지를 공격해 왔다. 다음은 지인이 보내 온 추보카 씨의 회고담이다.

 "어젯밤 우리 진지의 동쪽에 위치한 호주군 진지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고 산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우리 진지는 조용했지요. 폭풍전야의 긴장감. 1951년 4월 24일 밤 10시 정도 됐을 때 중공군이 일제 함성과 함께 벌떼처럼 많은 병력이 능선을 넘어왔어요. 조용한 밤에 함성소리는 공포 그 자체이지요. 피아간 총알이 빗발치고 콩 볶는 소리가 산야를 뒤덮었지요. 우리는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겼지요. 중공군 1진이 앞에서 꼬꾸라지면 2진, 3진, 4진이 파도처럼 밀려왔지요. 인해전술, 중공군의 전술이지요. 캐나다군 500명 대 중공군 5천 명, 수적 열세에서 공포감이 엄습했지요. 그러는 순간, 참호 안 내 우측에 있던 전우가 중공군의 총탄에 이마를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고 1m 정도 떨어져 있던 전우는 중공군의 총탄에 부상을 입어 신음하는데 돌볼 겨를이 없었지요. 내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그 순간 우리 전우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계속해서 총을 쏘고 또 쏘았지요. 5시간 정도 지났을까? 총성이 멈추고 멀리서 포성도 잦아들고 여명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광경,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1천여 구의 시신들, 그리고 곳곳 아비규환의 부상자 신음소리, 전쟁의 참혹함과 생과 사의 극한은 바로 이런 것이었지요. 중공군 사상자 1천여 명, 캐나다군 전사 10명, 중상 23명." 

 그는 캐나다에 복귀 후 캐나다군 한국전참전용사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으면서 참전용사들에게 장학금을 모금해 가평전투지역이 있는 가평군 북면 가평북중학교에 보내오고 있다. 1년에 9명의 학생들에게 1인당 25만 원, 총 225만 원을 보내오고 있다. 

 추보카 씨의 투병 소식을 들은 가평북중 학생들은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40편의 위문편지와 1권의 사진첩을 만들었다. 한국과 캐나다가 70년 전 가평에서 맺은 혈맹의 인연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추보카 할아버지 빨리 완쾌하세요. 추보카 할아버지 파이팅!" 학생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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