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세상에는 배워서 아는 것이 있고 경험해야만 아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산모의 진통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외로워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죽음까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의 심경을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공짜가 없습니다. 그런 아픔이 하늘을 향해 더 높이 오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 경험이 그동안 자신을 옥죄던 것들을 내려놓아 새로운 삶을 살게도 합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던 것이나 ‘틀리다’고 믿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옳고 그르다는 분별심을 내려놓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호기심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귀를 열고 눈을 뜨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배웁니다. 너와 나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요. 그리고 그동안 내가 추구하고 살았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이도환 저)에서 저자는 말을 잘 다루는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왕자가 말 다루는 법을 배우려고 그를 불렀습니다. "예, 왕자님. 제가 지닌 모든 기술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로부터 배우기 시작한 왕자는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에게 시합을 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거듭 패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왕자가 말했습니다. "그대는 내게 모든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 중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게 분명해. 내가 이렇게 계속 패하는 게 그 증거이지 않은가?"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아닙니다. 기술적인 것은 다 가르쳐드렸습니다"라고 하자 왕자는 "거짓말하지 말라. 그렇다면 내가 계속 패배하는 이유가 뭐냐?"고 역정을 냈습니다.

"말을 잘 다루려면 왕자님 몸 아래에 말이 없는 듯 자연스럽게 달려야 합니다. 즉, 말과 사람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경주할 때마다 저를 너무 의식합니다. 제가 앞에 있으면 따라잡으려는 마음에, 제가 뒤에 있으면 선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어찌 말과 하나가 돼 달릴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구두가 발에 잘 맞으면 구두를 신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걸어다닙니다. 이때가 구두와 발이 하나가 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본연의 일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말 타는 것에 몰입하지 못했습니다. 이기고 싶은 집착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승부욕이 말 타는 것을 즐기지 못하게 했고,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었습니다. 왕자는 승부에 마음을 빼앗겼던 겁니다.

이렇게 ‘너’를 이겨야겠다는 집착은 말을 타는 원래의 본질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돈이 왜 필요한지 모르고 돈을 따라가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좇는 것, 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들 역시 왕자의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착의 끝은 결국 패배입니다.

말 타기를 즐기려면 말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하나’가 되려면 내가 말이 돼 말의 입장을 헤아릴 때 가능합니다. 꽃과 하나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내가 꽃이 돼 꽃을 바라볼 때 꽃의 경이로움에 탄성을 자아내게 됩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내가 네가 돼 너의 입장을 헤아릴 때 진실한 사랑이 움트고 신뢰와 존경심이 우러나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을 ‘잘 다루려면’이라는 표현도 극히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다루는’ 것보다는 말과 하나가 돼 함께 ‘즐기는’이란 표현이 훨씬 더 낫습니다. 전자는 자칫하면 집착으로 이어져 패배의 늪에 빠질 수 있지만, 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기운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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