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성동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얼마 전 사극에서 노비의 아들이었던 자가 집안의 가난 때문에 중국으로 팔려 가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고 황제의 측근이 돼 권력가가 됐고, 이후 사신 태감이 돼 조국으로 금의환향하는 장면을 봤다. 조국의 왕, 세자, 고위 관료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려고 최고의 의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모든 것에 불만에 표했고, 환영만찬에서 결국 조국의 왕이 보는 앞에서 한 명의 관료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주인공이었던 세자만이 그의 만행에 대해 항의했고, 여러 차례 그의 얼굴에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어쨌든 사건은 종료되고 그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이 왔다. 작별의 순간까지도 세자와 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어색한 인사를 끝내고 다음에 두고 보자는 의미로 주먹을 꽉 쥐고 세자에게 냉정하게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의 귓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다. "이 나라의 세자로서 당신께 사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세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으로 팔려 가는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못난 국가를 대신해 세자인 내가 진심으로 당신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몇 초 이후 굳게 쥐고 있었던 주먹을 폈다. 

조국에서 천하고 천한 노비였던 그는 중국에서 성공해 조국의 왕도 두려워하는 대상이 됐다. 그가 중국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을 때 마음속으로 조국을 원망하고 조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이겨 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국에 사신 태감으로 와서 마음껏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세상이 멸망해도 있었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조국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청(淸)의 통역인 정명수가 있다. 그는 부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양반에게 죽음을 당하자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도망쳤다. 그리고 혹독한 이국땅에서 수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만주어를 배워서 결국 청군의 통역이 됐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있을 때 정명수는 조국인 조선의 왕에게 아주 통쾌한 복수를 한다. 청태종이 인조에게 하는 말을 정명수가 통역할 때 그는 청태종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통역했다. 청태종이 큰소리로 인조에게 잘못을 꾸짖으면 정명수는 그의 목소리 톤 그대로 인조에게 통역했다. 마치 청태종이 인조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노비였던 정명수가 조선의 왕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담아 야단치는 형국이 됐다. 

조선후기 세도정치가 극심해지면서 혹독한 세금과 가난을 피해 많은 조선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조국을 잃은 많은 조선 백성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은 못나고 못난 조국 때문에 이국땅에서 온갖 멸시와 고통을 이겨 내고 살아남아야만 했다. 긴 세월이 흘러 흘러서 그들의 후손들은 조국으로 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조국은 그들을 차갑게 대했다. 조국의 어떤 정권도 그들에게 세자처럼 못난 조국이 당신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리고 당신들을 차가운 이국땅에 힘들게 살게 해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소련이 붕괴된 후 이스라엘과 독일 정부는 소련에 살았던 동포들이 조국으로 돌아와서 잘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집 열쇠, 자동차 열쇠, 직장 열쇠 3개를 줬다고 알려져 있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이 있기 전 새해 첫날 명(明)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황제에게 큰절을 드리고 춤을 췄다. 그 순간 인조는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백성들이 머나먼 명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인조와 뭐가 다른가? 더 늦기 전에 우리 정부도 이제 사신 태감과 같은 중국동포들과 과거 소련동포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그들이 조국에서 잘살 수 있도록 해 주자.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누가 이것을 못하게 하고 있는가? 아직도 정명수와 같은 많은 동포들이 조국을 원망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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