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올 겨울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 지났다. 길거리 우수수 지는 낙엽을 밟고 지날 때면 새삼 덧없음이 속가슴을 때린다. 지구온난화로 좀 늦어지긴 하지만 김장철이 다가왔다. 이즈음은 산지에서 절임배추를 구해 손쉽게 김장을 담그기도 한다. 

주변인 중에 주말농장이나 제 집 인근 산자락 텃밭에서 자급용 채소를 얼마간 재배하는 경우를 본다. 지난 9~10월 초 동안에는 연이어 비 내린 날이 많아서인지 배추 무름병이 많이 번졌다. 공들여 가꿔 싱싱하던 배추들이 문드러져 잎들이 뒤집어 쳐지는 모습에 한숨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결국은 아예 뽑아 버리거나 미흡한 대로 거두는 경우가 상당했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희노란 속고갱이가 통통히 밴 청록 배추밭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슬슬 김장할 채비에 마음이 부풀 때다. 흐린 날씨에 연일 내린 강우라는 악천후가 해당 배추 작황을 망쳐 놓은 셈이다. 전문 농부가 아닌 도시농사꾼들이 소규모 채소를 틈내어 재배하면서 무름병에 미리 대비하기는 쉽지 않다. 평소 날씨라는 환경을 믿고 맡긴 탓이다. 나도 수년간 텃밭과 시나브로 함께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

작금 우리나라는 내년 대선 후보자 선출이나 지난해 4·15 총선 부정선거 시비 관련 일들로 어지럽다. 내가 칼럼 제목으로 ‘정치·사법·선거판’에 ‘작황’이란 용어를 붙인 것은 이유가 있다. 원래 ‘작황(作況)’이란 농작물이 잘 되거나 못된 상황을 이른다. 뿌리는 만큼 거둔다는 농작물보다 나을 게 없는 경우라 생각되니 이 말도 과분할지 모른다. 

오늘날 정치인·대법관·전 중앙선관위원장·변호사 같은 이른바 엘리트층 세계에는 배추 무름병 발생 환경보다 더 나은 모습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천연덕스러운 거짓말, 사탕발림식 교언영색 공약, 상대편에게 덮어씌우기, 한탕주의식 부동산 투기, 불투명하고 위압적이며 비정상적인 경선이나 소송 진행, 내로남불의 극치, 쌍욕·막말과 소시오패스의 인용까지 도무지 어디에 정치도의와 사법정의와 선거공정이 있는지 답답하다. 국가를 이끌어 갈 지도급 엘리트층이 이럴진대, 생업 일선에서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살아가는 일반 서민들은 어쩌란 말인가.

여야 1, 2위 정당은 얼마 전 내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를 확정했다. 최종 경선으로 확정된 두 사람 다 부동산 게이트니 고발사주니 하여 말들이 없지 않다. 입후보자 경선 과정에서 제기된 불공정성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해명보다는 당 지도부의 인신공격성 비난 따위로 어물쩍 넘어갔다. 

또한 제1야당이나 일부 보수 논객들은 대통령 후보자가 누구로 결정되든 간에 정권 교체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미 이런 말대로 정권 교체를 해 본 경험이 있다. 현 정권도 문제지만, 교체만 된다고 해 그들이 더 잘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미 자당 대통령을 탄핵한 바 있다. 후보자 주변에 엉겨붙은 정치꾼들 면면을 보면 알 것이다. 

대법관들의 경우 10월 29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오산 선거소송 재검표가 불공정하게 진행된다 해 원고 측이 퇴장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힘없는 민초들은 이제 누구를 마지막 보루로 삼아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아울러 중앙선관위 측은 지난 6월 인천 연수을 재검표 선거소송에서 투표지 이미지 파일 원본 제출을 거부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이 상태로 내년 대선을 치를 경우 실제 국민투표 수치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도 내 주변에 상당하다. 정치꾼들과 관련 유튜버들은 자기 직업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이 부정선거 항거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이참에 대법원과 선관위는 선거 관리와 선거소송 업무를 함께 할 수 없도록 완전히 기능을 분리해야 할 것이다.

마침 시골에서 시우(詩友)가 태백산 배추로 김장을 담가 땅에 묻어 뒀으매 먹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동지쯤, 김장독을 열면 풍겨올 시금한 냄새에다 지온에 푹 익은 백김치 국물을 접하러 가야겠다. 우리나라 엘리트층도 배추 무름병 작황 상태에서 과감히 벗어나면 좋겠다. 한 수 시조로 국리민복의 큰 지도자를 기다린다.

# 하늘 밥상

 그 김치에 그 밥인데
 그릇만 바꿔 될 일인가
 
 새 그릇에 새 김치 새 밥
 새 상차림 해야 한다
 
 이제는 
 하늘이 몸소
 상 차릴 대인 나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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