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오늘 글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우울증을 앓던 한 남성의 방화로 시작된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192명 중 한 분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연용호 저)에서 저자는 그분의 여고생 딸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쓴 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용돈 받는 날. 이번 주는 수학여행도 있고 해서 넉넉히 주실 것을 기대했지만 예전처럼 3만 원. 평소 쓰던 가방을 가져가기도 창피하고 신발도 새로 사고 싶었는데 화가 났다. 친구들은 용돈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한다. 친구가 쇼핑한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쇼핑 중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화가 나서 안 받았다. 30분 후에도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끄고 배터리까지 빼고는 신나게 돌아다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신발도 아직은 신을 만했다. 집에 가면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다. ‘아, 오늘은 엄마가 일하시는 날이지.’ TV를 켜니 뉴스가 나왔다. 대구 지하철에 불이 난 것이다. 불안했다. 엄마에게 전화했지만 통화 연결음만 들린다. 아까 꺼둔 핸드폰을 켰다. 문자가 다섯 통이나 왔는데 그 중 엄마의 글이 두 개나 있었다.

‘용돈 넉넉히 주지 못해 미안해. 집으로 가는 중이야. 신발하고 가방 샀어.’

‘미안해. 가방이랑 신발을 못 전하겠어. 돈가스도 해 주려고 했는데. 미안, 내 딸, 사랑해.’"

이 글을 접하면서 연기가 자욱한 지하철 안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던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어린 딸에게 신발과 가방을 사 주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어렵게 구한 돈으로 딸에게 줄 그것들을 사서 지하철을 탔을 때는 얼마나 기뻤을까? 어린 딸이 그것을 받아 쥐고 기뻐하는 모습을 그리며 무척이나 행복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암흑 속에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할 수 없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라고요.

자신이 죽어가면서까지도 현실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이 세상을 떠나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입니다.

제가 고교생 딸이 돼 보았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는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짜증을 냈고, 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을 알고 나서는 가슴에 피멍이 듭니다. 그때 왜 엄마에게 "나는 괜찮다고, 입을 옷도 충분하고 신발도 아직은 신을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몹시 후회됩니다. 생사의 경계선에서 엄마가 내게 전화했을 텐데, 왜 그때 전화를 꺼뒀을까를 두고두고 눈물로 삼켰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보낸 ‘미안해, 사랑해’라는 그 문자를 본 순간 꾹꾹 눌러둔 눈물을 쏟아냈을 겁니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나중에 사랑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회할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에 홍자성이 쓴 「채근담」에 "더위를 없앨 수는 없지만 덥다고 짜증 내는 마음을 없애면 몸은 항시 서늘한 마루에 있을 것이요, 가난은 꼭 쫓을 수는 없지만 가난을 근심하는 마음을 쫓으면 마음은 항상 안락한 집에 있을 것이다"라는 글이 나옵니다. 

가난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짜증과 원망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야만 극복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마음으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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