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활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성희활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늘은 34년간 철학을 가르쳐 온 월터 교수가 마지막 강의를 하고 은퇴하는 날이다. 한평생 이웃에게 친절하고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노 교수는 삶의 의미에 대한 강의를 한 후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서로 타인이 되지 말라는 말로 마무리를 한다. 그런데 평소처럼 아내에게 줄 수국을 사고 새로운 삶의 모습을 그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행히도 강도를 만나 흉기에 찔려 죽게 된다. 병원에서 부인은 수국을 전달하러 온 현장 목격자에게 혹시 남편이 남긴 마지막 말이 있었는지 꼭 알고 싶다고 채근한다. 목격자가 주저하면서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라고만 했다고 하자, 부인은 몽테뉴의 말이라며 그제야 표정이 평안해지면서 사랑 가득한 눈물을 글썽인다. 영화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라는 말은 몽테뉴의 수상록 제19장(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는 문장이다. 평생 어떤 죽음이 바람직한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던 몽테뉴는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음이 날 찾아오길 바란다. 죽음에 무심한 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때"라고 자신의 사생관을 정리했다. 이는 언제 죽음이 오더라도 담담히 맞이할 것이라는 굳센 다짐이고 그 담담함을 뒷받침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반영된 단단한 일상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로 잘못 알려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도 몽테뉴의 양배추 철학과 궤를 같이하는 말로 ‘일상이 곧 깨달음’인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담한 선언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인생을 바꿀 수 있는 7가지 질문’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히 그 중 "당신이 10년 안에 죽는다고 알게 된다면 인생에서 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첫째 질문이 흥미로웠다. 통상 버킷리스트는 1년 이내인 경우가 많고 거기에 평범한 일상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10년이라면 일상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수다 멤버들에게 물어보니, 답을 준 여섯 명 중 다섯이 "없음"이었고 하나가 "공부시간을 1시간 늘리겠다"였다.

10년이라는 시간을 비일상적인 것으로만 채울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일상 유지는 충분히 예상됐다. 그렇지만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확실히 죽는다는 것 또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기에 현재 생활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입장은 좀 의외였다. 추측키로, 모두 나이 60 전후라 이제 남은 인생이 무엇을 펼치기보다는 거둬들이는 여정에 가깝다는 점, 또한 대체로 물욕이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라는 점 등이 그런 답을 하게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인생을 나름 주도적으로 살아왔고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맞는 바람직한 일상을 현재 영위하고 있기에 별다른 후회나 아쉬움 내지 바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삶의 절대적 조건이다. 이 우주에서 나에게 가장 큰 사건은 나의 죽음이다. 진시황의 아들 2대 황제 호해는 목숨을 취하러 온 반란군 앞에서 천자가 아닌 변방의 제후라도, 제후가 아닌 평민이라도 좋으니 살려 줄 것을 간구했고 마지막에는 무조건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다가 초라하게 죽었다.

죽음을 직면할 때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지를 알려준다. 죽음을 직면할 때 삶은 불필요하고 덧 없는 것들이 제거되고 가장 중요하고 순수한 본질적인 것들로 간결해질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비범하게 한 것은 남다른 창의력도 있겠지만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죽음과 직면했던 사생관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할 때 죽음의 거울은 인생에서 무엇이 바람직한 지를 제대로 가르쳐 줄 것이다. 탐욕과 공포의 순간도 죽음의 거울에 비춰 보면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했지만 어찌 아침에만 좋을까? 죽음은 수시로 생각할수록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변화시킬 것이며 매일 새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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