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철 인천광역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최계철 인천광역시행정동우회 기획정책분과위원장

지방공무원의 꽃이라면 5급 사무관이다.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역할이 바뀌기도 하지만 나이나 경력 등 가장 원숙한 직급이다. 전에는 사무관이 되기 위해 모진(?) 시험을 치러야 했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었지만 2차 시험은 주관식이라 글씨도 잘 써야 했고 한자도 잘 섞어야 했다. 거의 40대 후반인 6급들이 사무관 시험에 몰두했다. 지금은 모두 심사승진으로 5급을 달아 일단 9급에 합격하기만 하면 다음 시험은 없는 셈이다.

조선시대 선배 공무원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과거시험은 소과·문과·무과·잡과가 있었는데 과거의 꽃은 문과였다. 3년에 한 번인 식년시 외에도 국가 경사가 있을 때에 치르는 별시(別試)도 있었다. 국가고시라 할 수 있는 문과 응시를 위해서는 먼저 소과인 생원, 진사가 돼야 했고 그것도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를 통과해야 했다. 초시에서 생원은 유교경전의 지식을 다뤘고 진사는 글을 얼마나 잘 짓느냐를 평가했다. 지역별로 합격자 수가 할당돼 지역에서 치르는 초시에는 각 700명, 한성에서 치르는 복시에는 각 100명씩 합격했다. 소과 합격자는 군역을 면제받고 미관말직에 제수되는 자격과 대과시험 응시,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됐는데 성균관에서는 300일 동안 수업을 하고 대과인 문과를 응시할 수 있었다. 합격자는 33명이었다.

소과 합격자는 참봉이나 훈도, 오위장 등 종9품(지방행정 9급)의 자리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드물기도 했지만 운이 좋다고 해도 10년에서 20년이나 걸렸다. 나라 전체 인구가 720만 정도이던 정조 21년의 초시엔 11만1천838명, 고종 16년(1879년) 정시엔 무려 21만3천500명이 응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27회나 응시한 사람도 있었다. 힘들고 힘든 그 시험에 왜 노인들까지 몰두했을까? 5살부터 과거를 준비하면 거의 30년 정도를 공부한 셈이다. 다름 아닌 학자로서의 공인된 지위를 부여받고 선비로서의 기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가문과 고장의 명예를 위하는 길이었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229회의 시험에서 생원 2만4천221명, 진사 2만3천776명이 합격됐다. 연평균 100명 정도이니 그 수도 적을 뿐 아니라 그 중 6.4%만이 문과에 합격(대과)하고 93.4%는 명예로 살았던 것이다.

소과에 합격한 자에게는 백패라고 하는 합격증을 줬다. 지금 전해오는 교지가 그것이다. 가문이나 지역의 품격을 논할 때 가문의 홍패나 백패의 수를 기준했다. 또 사마방목(司馬榜目)이라 해 시제(試題)와 시험 연월일, 시험감독, 장원 성명을 부기한 합격자 명부를 급제자와 관계자에게 나눠 줘 보존토록 했다. 흔히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자에게만 어사화를 꽂은 것이 아니다. 소과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도 문과급제와 같이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천동(天童)을 앞세워 악수를 울리는 3∼5일간의 시가행진이 허용됐으니 어찌 가문과 마을의 영광이 아닐 수 있으랴.

생원이나 진사는 거의 무직의 유생이었지만 지역에서 주민을 조직하고 향교와 서원을 장악하고 주민의 교화로부터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시설 관리와 이용, 분쟁이나 송사의 중재 등에 영향을 행사하는 막대한 유력자였다. 이른바 마을의 어른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공무원 임용장은 그때의 백패와 다를 바 없다. 의로움과 명예를 중시한 선조들의 바람은 관직에 나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진사나 생원이 돼 마을 일을 하는 것이 더 명예롭고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많은 퇴직 공무원들이 옛날 생원이나 진사와 같은 자세로 마을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고, 시는 이런 기회를 많이 부여해야 할 것이다. 주민참여예산, 더불어 마을 만들기, 주민자치회, 도시재생, 사회봉사 등등 많은 단체들에서 퇴직 공무원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퇴직 공무원들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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